“저는 원래 그런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 특별히 감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가 덤덤히 말하자 남자는 한결 편안해진 듯 몸에 긴장을 풀었고, 곧 그 남자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4월이었어요. 햇볕이 몸을 따스하게 데워주는 카페 명당에 앉아있었죠. 잠깐 선잠에 들었다가 깨서 얼굴을 양손으로 비비는데 이상한 게 만져졌어요. 제 콧등 옆에 무언가 연보라색의 종이 같은 것이 언뜻 보였는데, 너무나 생경한 느낌에 불길한 직감이 들었어요. 급히 거울을 들어 봤더니 내 얼굴엔 꽃이 피어있었어요. 네, 지금 보시는 제 오른쪽 볼에 있는 이 꽃이요.

 알아요. 정말로 불가사의죠. 종교계에서는 특히 저한테, 아니 제 얼굴에 핀 꽃에 관심이 많았어요. 근데 정작 저는 영생의 지표니, 신의 뜻이니 그런 것엔 관심 없어요. 저에게는 내 오른 뺨을 토양 삼아 피어난 이 달랑거리는 꽃과 함께 어떻게 평생을 살아갈 것인가, 그게 제일 중요한 문제니까….

 그러니까, 저는 한동안 살고 싶지 않았어요. 갑자기 저는 오른쪽 뺨에 꽃이 핀 사람이 되어버렸고. 세상이 나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겁이 났어요. 사람들은 내 꽃에 관심을 가졌어요. 한참을 제 꽃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관심이 떨어지면 모두 떠났어요. 그 사람들 입장에선 떠났다기보다 다시 제 갈 길을 간 거겠지만. 저는 주변에 아무도 없었거든요. 외로웠어요.

 꽃이 내 평범한 인생을 완벽히 앗아갔으니, 내 삶을 어느 정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내게는 선택권이 없다고. 지금 생각하면 꽃은 핑계에 불과해요. 나는 원래부터, 내 인생을 내다버리지 않을 용기 따윈 없었는지도.

 어쨌든 저는 죽기는 무섭지만 살기엔 괴로운 채로. 시간을 마냥 죽여가면서 살고 있었어요. 그러던 중에 그 여자애를 만났어요. 제가 한때 돈이 필요해 닥치는 대로 별의별 취재에 응했었는데, 그 애도 제가 만났던 기자들 중 하나였어요. 카페에서 인터뷰가 끝나고 짐을 싸다가, 그 애는 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솔직히 싫어하는 편이라고 말하더군요. 그 말에 나는 동질감을 느꼈어요. 나도 내 꽃이 싫었으니까. 그래서 유치하지만 내가 친구하자고 말했어요. 

 밥을 같이 먹고, 영화를 함께 보고, 도서관에 같이 갔어요. 그러는 동안 우리는 줄곧 친구였어요. 저는 그 애를 사랑하게 됐지만,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어요. 그 애가 가끔 하는 말들은 저를 웃게 만들었고, 나는 그 애의 말을 곱씹으며 마음껏 눈물 흘릴 수 있었으니까요.

 하루는 그 애가 제 꽃의 이름을 알려주더라고요. 이름은 노루귀, 꽃말은 인내라고. 그동안 한 번도 찾아볼 생각을 못했어요. 그때 처음 알았던 거예요. 제 꽃의 이름을. 이름이 촌스럽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꽃말이 인내라는 점은 마음에 들었어요. 그 애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더 마음에 들었는지 몰라요. 덕분에 결심했었죠. 인내. 나는 꽃말처럼 인내하기로 했어요.

 하루는 그 애가 점심 메뉴를 고민하듯 성의 없고 차분한 어조로 꽃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어요.

 “아빠가 가끔 엄마한테 꽃을 주곤 했어. 나는 그게 달갑지가 않았다. 왜, 꽃은 원래 사랑하는 사람한테 주는 거잖아. 근데 아빠는 엄마를 사랑하지 않았거든. 그보다는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아등바등 애쓰고 있던 거지. 모든 어른은 저렇게 고통을 숨기며 살아가야 한다는 걸 알게 되자 짜증이 났어. 그렇게 많은 꽃다발을 선물하고도 결국 이혼하는 걸 보니, 조금 허탈해지더라.

 아, 그리고 한 번은 남자한테 꽃다발을 받은 적도 있다. 사귀자고 하더라. 내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니까 징그러울 정도로 풍성한 꽃다발을 재촉하듯 내 머리통 앞으로 매섭게 들이미는데, 진짜 욕 나올 뻔 했어.”

 그 애는 종종 그렇게 말했어요. 아, 그런 세상에 살고 싶다. 꽃은 그저 꽃이고, 사랑은 사랑일 뿐이고, 마음은 마음일 뿐인.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기대하지도 않는 단순하고 솔직한 세상에.

 나는 정말이지, 나와 있을 때만큼은 그 애의 세상이 한껏 단순하기를 바랐어요. 꽃은 그저 꽃이고, 마음은 마음일 뿐인 세상을 선물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 애한테 꽃을 꺾어다 줬어요. 제 오른쪽 관자놀이 바로 아래에서요.

 그 애는 조금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줄기만 남아 초라해진 내 뺨과, 손에 쥐어진 노루귀 꽃을 바라보다가, 머지않아 눈물이 고일 정도로 말갛게 웃었어요. 그 애는 분명 꽃을 싫어한다고 했는데. 거짓 없이 환한 웃음을 지었어요, 내가 얼굴에서 꽃을 내어주는 순간에는 늘. 나 실은 꽃을 예뻐하는 것 같아. 그렇게 말하면서요.

 내가 꽃을 꺾을 때마다, 그 애는 어김없이 분무기에 물을 가득 채웠어요. 그리고 줄기가 으스러진 내 뺨에 물을 뿌렸어요. 그렇게 며칠이 흐르면 다시 꽃대에 솜털이 나고, 꽃봉오리가 부풀기 시작했어요. 그 애는 그렇게 내 노루귀를 살려냈어요. 꽃이 시들거나 꺾이면 그 위에 물을 끼얹고는 보람된 표정을 지었어요. 나는 언제든 그 애가 내 노루귀 꽃을 살려낼 거란 믿음을 가졌죠.

 우리는 말하자면 공생한 거예요. 꽃을 꺾어 화병에 꽂을 때마다 그 애의 세상은 조금 더 단순해졌고, 꽃을 되살릴 때마다 나는 삶을 계속하는 쪽을 선택했죠. 죽기는 무섭지만 살기는 괴로웠던 그 삶을 말이에요.

 그리고 나는 그 애와 함께 다짐했어요. 악랄하고, 지루하고, 조악하고, 끈질긴 것들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어찌됐든 끊임없이 살아가기로.

 남자의 인터뷰는 그 무엇도 명확한 것이 없었다. 지금도 그 애에게 꽃을 꺾어다 주는지, 그러면 그 애는 남자의 꽃에 물을 뿌리곤 하는지, 남자는 그 애를 여전히 사랑하는지. 

 그러나 꽃이 핀 남자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그 중 어느 것도 밝혀지지 않은 채 완결되었고, 나는 만족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잡지사로 돌아가는 내내, 남자가 인터뷰를 끝내기 전 했던 마지막 말이 귓가에 선명히 맴돌았다.

 “꽃을 되살릴 때마다 여전히 다짐해요. 주변의 모든 것들을 인내하고, 또 인내하기로.”

 나는 그 말을 입안에서 반복해 굴리며 그 말이 기어이 내 삶 안으로 들어오도록 했다. 인내하고, 또 인내하기로. 인내하고 인내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