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제이의 하루를 묻지 않게 된 건 다른 누군가를 만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수업을 듣기 시작한 시기가 겹친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이젠 제이의 존재가 내게 큰 기쁨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의 수업을 들었다.

 사과해야 했다. 오늘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전하지 못했다. 제이는 굳이 나에게 사과를 요구하지 않았다. 내가 문학 강사와 함께 알게 된 조용한 카페를 제이에게 소개했음에도, 제이가 그 카페를 즐겨 가기 시작했다는 걸 몰랐음에도, 안에서 셋이 함께 마주쳤음에도, 그의 손이 내 위에 있었음에도 제이는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테이크아웃으로 주문했다.

 머리를 짧게 자른 낯선 사람은 바닥에 질질 끌릴만한 청바지를 입었다. 슬리퍼에 양말을 챙겨 신는 사람이었다. 나는 부츠를 신었다. 나의 머리카락이 걔의 머리카락보다 족히 일곱 배는 길어 보였다. 제이와 나에겐 딱 그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이상형의 딜레마에 대해 생각했다. 제이에게 너처럼 머리가 짧고 키가 크고 운동하는 사람이 좋다고 했다. 그러면 제이는 자기 머리를 크게 두 번 쓰다듬었다가 다음 데이트에 머리를 자르고 왔다. 제이의 그런 면은 참 귀여웠지. 그런 감상이 남는다.

 제이는 나의 말을 늘 흥미로워했지만, 이해하는 편은 아니었다. 돌아오는 반문에 대응할 기력이 없을 때쯤 걔는 자기 얘기를 중얼거렸다. 제이가 아는 건 내가 아는 게 아니었고, 내가 아는 걸 제이는 몰랐다. 대신 모르는 건 궁금한 것과 다르다는 걸 알았다. 나는 그때부터 사과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멋대로 너와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점을 사과해야 했나. 그래서 더는 내 이야기를 네게 전하고 싶지 않았다고 털어놔야 했나. 처음부터 너에게 어떤 기대도 없었다고 말해야 했나. 이 모든 말의 뒤에 ‘미안해.’가 붙었어야 했을까.

 제이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그 가정을 생각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가장 멍청한 건 아무것도 모르던 나였을지, 알면서도 내게 꽃다발을 건네준 제이인지.

 처음 보는 사람과 이름을 주고받는 게 싫었다. 제이와 헤어지는 순간부터 다시금 싫어졌다. 그렇게 촌스러운 이름이 다시 내 이름이 됐다. 어감도 딱딱하고, 생긴 것도 못생겼고, 아무리 로맨틱하게 불러봐도 산통을 깨는 이름이 나의 이름이었다. 제이는 내 이름을 처음 듣고 세 번 정도 중얼거렸다. 이름이 좀 특이하죠. 언젠가 꼭 개명할 거예요. 내 이름을 명함에 새겨야 할 때가 오면 무조건 바꿀 거예요. 묻지도 않은 말을 혼자서 막 떠드는 건 부끄러운 탓이었다.

 아니요. 꼭 꽃다발 같이 들린다고 생각했어요. 제이는 내게 그렇게 말했었다.

 어제 문학 강사에게 작은 꽃 한 송이를 받았다. 아리송하게 오늘 제이도 내게 꽃다발을 선물했다. 둘은 완전히 다른 말을 전했다. 강사는 자신과 진지하게 만나봤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제이는 잘 지내라며 인사했다. 마치 사랑 고백을 받은 사람처럼 꽃다발을 들고서 눈물을 훔쳤다. 버스가 과속방지턱을 넘을 때면 꽃들이 소란스러운 소리를 냈다. 눈에 띄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작은 복수를 남기고 떠나는구나. 꽃의 머리를 부여잡고 얼른 눈을 닦았다.

 제이가 내 이름을 꽃다발이라 저장한 게 좋았다. 나를 우리 꽃다발이라 부르며 안아줄 때도 좋았다. 그럴 때면 명함에 촌스러운 이름을 적어야 해도, 이름 석 자가 크게 박힌 명찰을 달고 다녀야 해도 괜찮을 것처럼 느껴졌다. 제이는 그런 다정함으로 매시 매분 꽃다발을 선물했었다.

 집에 큰 화병 한 개를 가져다 놓았다. 물은 넣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문학 강사의 꽃은 조화였다. 생화 선물의 감수성도 모르는 남자의 문학 강의를 듣고 있었네. 조화는 화장실에 장식해 놓았다. 테이블에 놓인 제이의 꽃이 아직 싱글거렸다. 점차 말라갈 테지. 버석거리는 내 이름도 다시 바꿔버리고 싶을 거야. 그걸 지켜보라고 이런 선물을 했니. 앞으로 내게 꽃다발을 줄 사람이 있을까. 매일 매시 매분. 아무렇지 않게 내게 꼭 맞는 꽃다발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