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나는 전교에서 가장 큰 꽃을 받았다. 일로 바쁜 부모님이 본인들 대신 거대한 화환을 참석시킨 것이다. 엄마와 아빠는 매번 그런 식이었다. 나를 보거나 안는 대신 크고, 비싸고, 좋은 것을 쥐여주며 사랑이라 믿기를 바랐다. 나는 지루한 표정으로 그것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사랑은 형체가 없다고 했는데, 아직 어린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는데. 엄마 아빠는 저주에 걸린 게 분명하다. 유능하고 똑똑해지는 대가로 사랑만은 알 수 없는 어른이 되어버렸구나. 모르는 친구들까지 화환에 적힌 내 이름을 보며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 낯선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나를 콕 하고 찌르는 게 느껴졌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 한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또래보다 한참 작은 키의 여자애가 작은 손으로 엄지를 치켜세우고는 나를 향해 생긋 웃어 보이고 있었다.

"네 꽃다발 짱 멋있다."

친근하고 다정한 그 애의 태도에 악의는 조금도 없는 것 같았다. 나도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여울이는 6학년 때 우리 학교로 전학을 왔다고 했다. 졸업식이 끝나고 친구들이 가족에게 달려가 안길 때, 그 애도 나처럼 혼자였다. 그날 우리는 함께 짜장면을 먹으러 갔다. 서로의 입가에 묻은 검은 짜장 양념을 보며 가게를 꽉 채운 가족들의 대화 소리가 묻힐 만큼 크게 웃어댔다. 식사를 마치고는 놀이터 그네에 앉아 주위가 어둑해지는 것도 모르고 함께 시간을 보냈다. 나는 친한 친구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부모님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우리 엄마 아빠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따스한 눈맞춤과 포옹을 언제나 반짝거리는 물건으로 대체하려고 한다고 말이다. 졸업 선물로 받은 새 신발을 마구 모래에 문지르며 더럽혔다. 시선이 닿는 내 몸 곳곳이 부모님의 가짜 사랑으로 가득한 것이 끔찍했다. 첫 만남에 그런 깊은 속마음을 꺼내 보인 이유는 감히 여울이가 나와 비슷한 처지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여울이는 나를 바라보며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후 중학교에서 여울이를 다시 보게 되었고,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인사했다. 여울이가 그때처럼 밝게 웃으며 답해줄 거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상과 달리 여울이는 차갑게 나를 지나쳐갔다. 길고 가지런한 여울이의 교복 치마가 펄럭거릴 때마다 심장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친구를 통해 여울이가 도서부라는 사실을 들은 후로는 도서실 근처로도 가지 않았다. 우리 사이의 어떠한 오해도 바로잡고 싶지 않았다. 우리랄 것도 없었다. 졸업식날 처음 만나 몇 시간 얘기를 나누고 헤어진 게 다인 사이니까. 고작 그런 사이를 친구로 착각한 내가 이상한 거였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도서실에 한 발자국도 들이지 않겠다는 나의 다짐은 생각보다 쉽고 빠르게 무너졌다. 점심을 먹고 친구들과 반으로 돌아가는 길에 도서실로 해맑게 웃으며 뛰어가는 여울이를 보게 된 것이다. 나는 도서실로 들어가 책을 하나 고르고 여울이에게로 갔다. 여울이는 내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기계처럼 말했다. 대출되셨어요, 일주일 뒤에 반납해 주시면 됩니다.

"혹시 연장도 되나요?"

읽지도 않을 책을 들고 질문을 하는 나를, 여울이는 계속 모르는 사람처럼 대했다.

"그럼 우리는? 친구 기한도 연장돼요?"

자존심도 버리고 한 마지막 질문에서야 겨우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여울이는 머뭇거리다 작게 응, 하고 대답했다. 눈시울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그날을 이후로 여울이와 나는 매일같이 붙어 다녔다. 여울이의 행동에 대해서는 굳이 묻지 않았다.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은 언제나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즐거웠다. 중요한 건 그것뿐이었다.

중학교 1학년의 마지막 학기가 끝나갈 무렵에 처음으로 놀러 간 여울이의 집에서, 나는 여울이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여울이는 라면을 끓이며 자신이 일찍 부모님을 잃고 할머니와 둘이 살고 있다고 말했다. 부모님이 보내준 거대한 화환을 부끄러워하며 투정 부리는 날 보고 여울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작은 두 손을 내려다보며 얼마나 공허했을까. 나는 라면의 절반 이상을 남기고 집으로 돌아갔다.

여울이는 이제 더 이상 비밀이 없어 좋다면서 나를 자신의 집으로 자주 초대했다. 그러나 나는 그럴수록 여울이에게 숨기는 것이 많아졌다. 우리 집과는 사뭇 다른 여울이 집의 분위기가 그 원인이었다. 여울이의 집은 우리 집 안방만 했다. 반지하라 빛이 잘 들지 않았고 어렵지 않게 곰팡이가 슨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처음엔 죄책감이었다. 좋은 것들로 무장한 내가 무슨 배부른 소리를 한 거지, 하는. 한편으로는 점점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울이의 할머니가 자신의 손녀를 위해 손수 차려두고 간 밥상과 먼지 쌓이지 말라고 그 위에 얹어둔 밥상보, 여울이가 그린 할머니의 초상화, 할머니가 여울이에게 쓴 짧지만 따스한 메모들. 사진 속 서로를 바라보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 할머니와 여울이. 여울이가 나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 당연했다.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는 여울이가 내가 느끼는 좌절감 따위는 조금도 이해할 리 없었다.

나는 여울이를 쌀쌀맞게 대하기 시작했다. 여울이는 이미 많은 사랑을 받고 있으니까 내가 조금 심술을 부려도 될 것 같았다. 여울이의 놀자는 약속을 거절하고, 반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다. 급식 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나를 찾아오는 여울이를 모른 체했다. 우리는 어느새 가장 친한 친구에서 인사만 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          

중학교 마지막 날, 나는 역시나 혼자였다. 최대한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오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울이가 할머니의 손을 잡고 웃는 얼굴로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여울이는 어느새 나와 키가 비슷해져 있었다. 나는 말없이 여울이를 바라보기만 하다 눈물을 흘렸다.

"우린 이해가 따로 필요한 사이가 아니잖아."

여울이가 품에서 꽃줄기 몇 개를 꺼내며 말했다. 할머니의 허락을 구하고 텃밭에서 꽃 몇 개를 꺾어왔단다. 나는 그때 놀라운 경험을 했다. 형체가 없다 생각했던 사랑을, 그토록 투명한 사랑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게 된 것이다. 나는 그날 세상에서 가장 예쁜 꽃다발을 받아 들고 여울이, 그리고 여울이의 할머니와 함께 짜장면을 먹었다. 이번엔 일부러 크게 웃지 않아도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