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월호《풋》: 희서를 찾아서

6편째 풋소설

2024. 2. 23.

🍏 2월호《풋》: 희서를 찾아서

6회 (2024.02.24)

2월호 주제 《풋》

희서를 찾아서

진희

눈꺼풀을 움직여보았다.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을 힘겹게 올려보는 것도 수백 번째다. 오늘은 왜인지 눈을 뜰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태어났다. 나를 찾아오는 단 한 사람에게서. 나는 존재하기만 했었다. 그 사람은 평범하게 배양되는 단백질 덩어리일 뿐인 나를 선택했고 생명을 탄생시키는 실험을 시작했다. 그 결과물로 나는 태어났다.

나는 태어나기만 했지 아무런 능력이 없었다. 말을 할 수도, 손을 쥘 수도, 마음대로 되는 게 없었다. 그렇게 무(無)의 시간을 보내던 나에게 어느 순간 신기한 능력이 생겼다. 내가 나임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인지한 나의 처음은 이전과 딱히 다를 바가 없었다. 조용하고, 공허하고, 멍한 나날들의 반복이었다. 그런 재미없던 삶이 뒤집힌 건 아주 사소한 이유였다. 당시에 나는 아직 눈도, 귀도 없었지만, 그가 내게 준 감정이 잊히질 않는다. 나의 자그마한 심장 소리를 눈치챈 그가 내 머리(머리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한 상태였지만)를 떨리는 온기로 쓰다듬던 날. 그날부터 나는 의미와 무의미의 차이를 깨닫게 되어버렸다.

점차 나는 팔과 다리가 생겼고 눈과 코, 입과 귀를 가지게 되었다. 귀가 생기고 뇌가 발달하면서 정확하게 인지한 단어가 생겼다. ‘희서’. 내려앉는 침묵 속에서 유일하게 들리던 단어이자 그 사람이 나를 보며 길게, 옅게 내뱉는 단어. 처음에는 희서가 무엇인지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희서는 나를 부르는 단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매번 내가 머무는 수조를 어루만지며 희서라고 말했다. 희서, 희서, 나는 희서. 그가 내게 이름 붙인 단어. 그는 나에게 생명을 주고 희서라는 의미를 붙였다. 그가 나를 희서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필요는 없지만, 그렇지만. 궁금해졌다. 그가 나를 보며 내뱉는 희서란 단어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는 왜 매번 떨리는 손으로 부서질 듯이 나에게 닿으려 노력하는지, 왜 계속 나를 다듬고 그 과정을 함께하는지, 이 모든 의문을 알고 싶어졌다. 눈을 뜨고 움직이고 싶어졌다. 그를 만나기 위해 난 오늘도 나의 눈과 몸에 부단히 힘을 준다.

……이상한 느낌. 뭔가 부드럽고 유연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알 수 없는 신호가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저릿한 느낌과 함께 손이 자유롭게 움직인다는 걸 깨달았다. 주먹을 쥐어 보았다. 약하지만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접히는 손의 움직임이 새로웠다. 발가락도 움직여지는지 확인해보았다. 발가락이 발바닥에 닿았다. 나는 깨어났다. 이제 눈을 뜨고 따뜻한 수조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되었다. 눈만 뜨면, 눈을 뜨고 지금처럼 발을 움직이면 나를 희서라 부르는 그에게 갈 수 있다. 이 수조 밖을 나가 그의 눈을 마주보며 이야기를 할 것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지. 그를 보고 입에 담는 첫 문장이 무엇이면 좋을까. 나의 언어가 그의 언어에 와닿을까. 나의 미숙한 언어를 그가 이해해주길 바라며 발을 차고 수조 밖으로 나갔다.

수조 밖의 세상은 정신이 없었다. 내리쬐는 불빛들과 웅성거리는 사람들. 그 사람이 아니야. 내가 찾는 사람은 이 사람들이 아니라고. 그 사람, 나를 희서라 부르는 그 사람은 어디에 있지? 나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아주 서럽게 울었다. 그들은 갑자기 내 몸을 들어 옮기더니 방향을 바꿨다. 순간 귀에 그가 날 희서라고 부르는 단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연스레 눈이 목소리를 따라갔고 시선의 끝에는 그토록 궁금했던 그가 내 앞에 누워있었다. 땀에 젖어 축축해진 얼굴과 머리칼, 비릿한 피 냄새 사이로 나를 보는 눈물 맺힌 눈. 나를 탄생시킨 사람은 아주 힘들어 보였다. 그럼에도 기쁨이 피어나는 얼굴을 보고 나는 잠시 정지했다. 말을 고를 시간이 필요했다. 하고픈 말이 너무 많았지만, 그에게 전하고 싶었던 단 한마디의 말을 입 밖으로 보낸다.

엄마, 희서가 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