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이 아파. 꼭 유리 조각이라도 걸린 것처럼.”

 오랜만에 걸린 지독한 감기였다. 그러니 거기까지는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 덧붙인 말들. 이를테면 머리가 지끈거려서 못 버티겠어, 온몸이 펄펄 끓어, 같은 말들은 실은 전부 거짓이었다. 내가 아파 죽는 시늉을 할 때 그는 내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귀 뒤로 넘겨주고, 이마에 커다란 손을 대고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때마다 푹신한 이불 속으로 한없이 빠져드는 꿈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좋지, 이 남자 앞에서 나는 자꾸만 불쌍해지고 싶다.

 그는 팔을 걷어붙이고 능숙하게 야채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감기에 걸린 것 같다는 문자를 보낸 뒤에도 밥은 먹었는지, 얼마나 아픈지 묻지도 않길래 바쁜가 했더니 곧장 장을 봐 달려온 모양이었다. 집에 참치 캔이 있느냐고 물어온 것으로 보아 아마도 메뉴는 야채 참치 죽. 나는 턱을 괴고서 나를 위한 죽을 끓이는 그의 뒷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그의 등은 아주 넓다. 뒤에 서면 여자치고는 덩치가 있는 편인 내 몸도 다 가려질 만큼 커서, 몇 시간이고 바라만 보아도 재밌는 등판이다.

 나는 기운 빠진 몸을 이끌고 그에게 다가가 등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가, 슬며시 품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는 한 손으로 내 허리를 감싸고 남은 한 손으로는 계속해서 죽을 저었다. 평범한 연인들의 주말 풍경. 그치만 우리는 연인 사이가 아니다. 그냥 동네 지인, 아니 그보다는 조금 더 가까운 동네 지인이라 할 수 있겠다. 누군가 우리 관계에 의문을 가지고 명확한 설명을 요구한다 해도 나로서는 딱히 할 말이 없다. 그저 그가 그렇게 정의 내렸고, 이후로는 특별히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딱히 해명을 바라지 않았다. 어쩌면 나조차도 굳이 머리 아프게 여러 이유를 대가며 관계에 이렇다 할 이름을 붙이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편하다.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다는 건. 자유로운 기분으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건.

*

어느 늦은 저녁, 편의점 앞 테라스에서였다. 한 남자가 보리차와 견과류를 사들고 건너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오가면서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낯선 얼굴이었다. 그는 캐슈넛과 피칸, 아몬드와 크랜베리를 차례대로 집어먹고 보리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또. 이번엔 크랜베리와 피칸, 캐슈넛과 캐슈넛, 또 보리차 한 모금.

“저는 점이 있는 남자를 좋아해요.”

 꿀꺽하는 소리가 끝나자마자 나는 대뜸 남자에게 말했다.

 “점이요?”

 

 남자는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이내 관심을 보였다. ‘저 사람 어쩐지 끌리는걸’보다는 ‘저 사람 뭐 하는 인간이지?’에 가까운 관심 같긴 했지만.

 “네, 점이요. 위치는 크게 상관없어요. 눈에 잘 띄는 곳에만 있으면 돼요. 근데 눈 바로 옆은 안 되고, 입 근처도 안 돼요. 아, 말하다 보니 위치도 중요한 것 같네요.”

 

 남자는 더 듣고 싶다는 듯 내 눈을 쳐다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크기는 너무 크면 안 되고, 완벽한 원 모양이어도 안 돼요. 그저 자연스럽게 얼굴에 어우러지면서도 은근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어야 하죠.”

 “나도 있는데, 여기.”

 남자는 자신의 볼을 집으며 말했다.

 “안 보여요.”

 

 내가 말하자 남자는 내 쪽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손가락을 여전히 볼에 가져다 댄 채로. 그가 가리킨 부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작고 귀여운 점 하나가 박혀 있었다.

 “그러니까요. 있네요.”

 남자의 시선은 테이블로 향했다.

 “편의점 앞에서 노트북이라니, 소설이라도 쓰나 보죠?”

 

 남자가 물었고, 나는 놀라면서 맞다고 대답했다. 남자도 장난으로 뱉은 말이었는지 놀란 눈치였다.

 그는 호기심에 찬 눈으로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어떤 장르의 소설을 쓰는지, 영감은 주로 어디서 받는지, 또 지금은 어떤 글을 구상하고 있는 건지… 어느새 남자와 나 사이의 거리는 점 얘기를 할 때보다 훨씬 가까워져 있었다. 나는 조금 물러나면서 말했다.

 “나는 그래서 사람들을 좋아해요. 낯선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도요. 좋은 이야깃거리가 되거든요. 조심해요. 내가 언젠가 당신을 이용할 수도 있어요. 그쪽 성격과 사소한 습관들을 훔쳐 와서 인물의 특징으로 삼는 거예요. 고치고 싶은 버릇을 강조하거나 괴상한 취향을 덧붙일 수도 있어요. 불행을 가득 품은 인물로 묘사하거나, 존재감 없고 초라한 인물, 끔찍한 악인, 그도 아니면 짐승으로 만들 수도 있겠죠. 마치 키르케처럼….”

 이런 말을 듣고 난 사람들은 백이면 백 어색하게 웃다가 찜찜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는 금세 자리를 뜨곤 했다. 하지만 남자는 아주 태연하게, “그래도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된다니 기분 좋은데요. 나도 들어가게 해줘요. 그 소설 안에.” 하며 말하는 거다.

 그 순간 나는 떠오른 영감을 붙잡듯이 그의 팔뚝을 붙잡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렇게 우리가 알고 지낸 지도 반 년. 하지만 여전히 나는 그의 이름도, 나이도 모른다. 그에 대해 기본적이라 할만한 것들은 전부 모르고, 사소하다 할만한 것들은 죄다 안다. 뻔한 질문과 답변은 특별한 우리 관계에 어울리지 않으니까. 알지 못하기에 더 재밌다고 할까. 나는 제멋대로 그에게 이름을 붙여본다. 결, 유한, 노을, 도원, …에더? 그의 나이도 시시각각 변한다. 그가 어리광을 피울 때는 동생이 되고, 손을 잡을 땐 친구가 되었다가, 다시 능숙하게 허리에 손을 올릴 때는 연상이 된다.

 대신 나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그를 느낀다. 그가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내게 알아서 다가오는 것들. 내게는 그런 것들이 더 중요하다. 가령 그는 남자 향수 같은 것은 뿌리지 않는다. 그에게서는 옅은 집 냄새가 난다. 금방 샤워를 마친 집, 비눗물을 끼얹은 집.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안전한 집. 그 때문에 나는 그와 어디를 가든 부드러운 안정감을 느낀다. 그런가 하면 그의 어깨는 나를 온갖 고민에 빠지게 만든다. 최근에는 아직도 한참 남은 크리스마스에 그와 무얼 하는 게 좋을까…하는 고민에 빠져 멍해졌던 기억이 있다. 그는 유월에도 한겨울의 크리스마스를 떠올리게 하는 그런 남자다.

 다만 그는 내게 번뜩이는 소재거리를 던져주기는커녕 도리어 나의 작업을 방해하고 있다. 소설을 쓰다 보면 모든 인물이 그가 되어버린다. 지금 나의 소설은 며칠째 주인공이 이별을 하는 장면에서 멈추어 있다. 주인공에게 이별을 고하는 인물의 대사를 생각해 내야 하는데, 생생한 말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가장 매몰차고, 가장 아픈 말을 생각해 내야 해. 가슴을 후벼파버리는 거야, 주인공이 다시는 사랑할 수 없도록. 아주 깊고 깊은 상처를 주도록…. 그렇게 되뇌고 있으면 그 인물은 그의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음, 이별이라니. 꼭 지금 해야 하는 거야? 마음 아프잖아. 근데 너 지금 괜찮은 거 맞지? 너무 잘하려고 하지 않아도 괜찮아.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 참 그건 그렇고, 나는 그 소설에 언제쯤 등장하는 거야?

 그는 실제로도 종종 그렇게 물어온다. 하지만 나는 그를 소설에 쓰고 싶지 않다. 이미 그와 나누는 대화가 소설 속에서 오가는 대사 같고, 그와 함께하는 매 순간이 소설 속의 장면 같으니까. 이 소설만큼은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다.

 닳도록 꺼내 읽던 연애 소설도 이제 더는 펼치지 않는다. 그와 마주 보고 있는 것 자체로, 연애 소설을 읽고 있는 듯한 기분에 휩싸인다. 그는 정말이지 내가 꿈에 그리던 남자이자, 명확히 안기고 싶은 남자다.

*

 그가 침대 위에 누운 나를 앉히고는 뒤에서 폭 껴안았다.

 “감기 옮는다니까.”

 “상관없어.”

 

 나는 그의 손등 위로 세차게 뻗친 핏줄을 넋 놓고 감상했다. 생생한 활기를 온몸으로 표출하는 굵은 선. 그 선의 경로를 눈으로 좇는 일은 매번 즐겁기만 하다. 하지만 늘 무언가에 가로막히고 있다는 기분이 떨쳐지지 않았다. 나의 탐닉을 방해하는 유려한 은빛 고리. 오늘도 그의 왼손 약지 위의 반지는 천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의 존재는 그가 자신의 손으로 볼 위에 점을 가리킬 때부터, 아니 실은 그가 테이블에 앉아 입속에 조용히 캐슈넛을 집어넣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와 묻는다면, 이 반지는 뭐야? 하고 새삼스럽게 묻는다면 그다음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는 솔직하게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이야기하려나.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렇구나, 나도 상관없어. 말하고 다시 그의 품에 고개를 묻으려나…

 

 센치한 기분이 들었다. 그에게 다른 사람이 있대도, 나보다 그 사람을 더 사랑한대도, 그럼에도 나는 정말 괜찮은 걸까.

 그는 말이 없어진 나를 발견하고는 말했다.

 “왜 그래? 또 머리가 아픈 거야? 참, 약을 안 먹었구나. 잠시만 기다려봐.”

 나는 일어나려는 그의 팔뚝을 붙잡았다. 그가 내게서 멀어지려 할 때면, 이제 더는 떠오르지도 않는 영감을 붙잡듯 그를 붙잡고 싶다. 그의 포옹을 바라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그의 미소도, 그의 마음도, 그의 진심도. 그러나 느지막한 오후가 다가올수록 짙어지는 그의 턱 위, 거뭇한 수염 자국을 마주하면 나는 어김없이 아직도 부족해, 한 번만 더, 아니 몇 번이고 더.라고 말하고만 싶어지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