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월호《그럼에도》: 한편

82편째 풋소설

2025. 6. 13.

🍏 6월호《그럼에도》: 한편

82회 (2025.06.14)

6월호 주제 《그럼에도》

한편

허운

그날 민은 커다란 볼풀에서 눈을 떴다. 빨강, 파랑, 초록, 노랑··· 색색의 플라스틱 공이 민의 몸을 가렸다. 그 사이로 빼꼼히 얼굴만 내놓은 민은 익살맞게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방금까지 뛰어논 것처럼 입으로 숨을 몰아쉬었고, 부릅뜬 눈은 눈동자 사방으로 흰자가 다 보일 만큼 커다랬다. 민은 한참을 눈동자만 굴리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밑에 깔린 공들 위에 중심을 잡고 앉느라 몸이 자꾸만 기우뚱거렸다. 결국 민은 걸음도 헤엄도 아닌 애매한 동작으로 움직여 볼풀을 벗어났다.

민은 안방 문을 열고 거실로 나섰다. 볼풀로 방이 가득 차 문은 반밖에 열리지 않았다.

“음음음 잘 늙고 싶어/ 흠흠흠 빨리 늙고 싶어/ 홍홍홍 이건 무한도전”

민은 이상한 노래를 매일 새로 지어 불렀다. 멜로디는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가사 내용은 매일 달랐다. 어느 날은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고 했고, 또 어느 날은 전쟁이 무섭다고, 또 다른 날은 밥이 설익어 화가 난다고 했다. 뭐가 됐든, 민 혼자 듣고 민 혼자 불렀다. 아무도 듣고 기억하지 않았기 때문에 민의 노래는 매일 생겼다가 매일 사라졌다.

민은 부엌으로 가 칼을 집어 들고 테이블 위에 놓인 사과를 깎았다. 삐뚤빼뚤 두껍게 껍질을 깎아내고는 그것을 한입 크기로 잘랐다. 민은 문득 뭔가가 생각난 듯 칼을 내려놓고 텔레비전 앞으로 향했다. 아침뉴스를 틀고 오늘은 앵커가 무슨 색 넥타이를 맸는지 확인했다.

‘흠 팥죽색은 별론데’

민은 채널을 돌려 예능 재방송을 틀어놓고 도로 부엌으로 향했다. 사과 조각은 6개, 사과 껍질 조각도 6개. 민은 사과를 한입 먹을 때마다 사과 껍질을 한 조각씩 버렸다. 6번 먹고, 6번 버렸다. 그 행동이 너무 빨라 누군가 옆에 있었다면 ‘자른사과빨리먹고자른사과껍질조각빨리버리기를연속적으로빨리반복하기대회’에 출전했냐고 물어봤을 것이다. 민은 마지막 사과 조각을 먹을 때는 조금 버겁다고 느꼈지만, 마지막 껍질 조각을 버리기 위해 꾸역꾸역 사과를 뱃속에 밀어 넣었다.

사과를 다 먹고 시계를 보니 여섯 시 반이었다. 아직 출근 시간까지 꽤 여유가 있었다. 민은 그대로 후드집업을 하나 걸쳐 입고 집을 나섰다. 5분 정도 걷자, 동네 아이스크림 할인점이 나타났다. 민은 멜론 맛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 들고 아파트 놀이터로 향했다. 오늘 비가 온다고 했던가, 습한 공기와 구름 낀 하늘에 낡은 놀이터가 더욱 우중충하게 보였다. 회색빛 풍경 사이로 민의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만이 또렷했다.

민은 다시 먹는 일에 집중했다. 이번에는 바 아이스크림을 돌려 먹기 시작했다. 보통 스크류바만 그렇게 먹는다고들 하지만, 민이 보기엔 별 다를 것도 없었다. 민은 ‘안 될 건 또 뭐람’이라고 되뇌며 각진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고 돌리기 시작했다. 입으로는 최선을 다해 먹고 양손으로 막대기 부분을 빙글빙글 돌렸다. 처음에는 딱딱한 아이스크림이 잘 굴러가지도 않고 자꾸만 이에 박혀 애를 먹었다. 결국 매끄럽게 녹아 중간부턴 수월했지만, 끝까지 돌려먹는 방식을 고수하는 바람에 아이스크림 국물이 손이며 잠옷에 온통 흘렀다.

끈적거리는 채로 집에 돌아가니 일곱 시 오 분이었다. 민은 옷을 모두 벗어 세탁기에 넣고 곧장 화장실로 들어가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민은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무향의 샴푸를 두 번쯤 짜서 쇄골 정도까지 오는 적당한 머리에 얹었다. 적당히 물을 끼얹고 머리에 비벼 적당히 거품을 냈다. 머리를 감는 중간중간 간지러운 부분은 적당히 긁기도 했다. 거품을 헹궈낸 민은 몸을 씻고, 세수를 하고, 머리에 남은 물기를 적당히 털어냈다. 마지막으로 적당한 치약으로 적당히 양치하고 욕실을 나섰다.

머리를 말리고 옷을 입는 등 남은 준비를 모두 마치고 시계를 보니 일곱 시 사십오 분이었다. 출발 시간까지는 10분 정도가 남은 상황. 민은 다시 안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볼풀로 풍덩, 뛰어들었다. 민은 팔과 다리를 벌려 실제로 물속을 헤엄치듯 플라스틱 공 사이를 갈랐다. 열정적으로 발장구를 치는 바람에 공들이 풀 밖으로 튕겨 나가 ‘텅-텅-‘거리며 멀어졌다. 공 사이로 고개를 묻자 플라스틱 냄새가 쏟아졌고, 눈을 뜨니 온통 원색이었다. 공 틈에서 몸을 축 늘어뜨린 민은 잠시 가만히 있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시리야! 지금 몇 시야?”

잠시 뒤 그의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이 대답했다.

“네, 부르셨어요?”

“어. 지금 몇 시냐고”

“지금 시각은 일곱 시 오십팔 분입니다.”

민은 시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성큼성큼 걸어 볼풀 밖으로 나갔다. 가방에 공이 하나 딸려 간 것도 모른 채, 문밖으로 나섰다. 챙겨 입은 셔츠와 재킷, 슬랙스와 구두가 삽시간에 습기를 머금어 민의 몸무게만큼 무거워졌다. (실제는 아니고 민의 기분이 그랬다) 민은 헐레벌떡 뛰어 매일 타야 하는 ‘그 버스’를 ‘제 시간’에 탔다. 그렇게 출근하고 일하고 점심 먹고 일하고 조금 졸다가 일하고 퇴근했다. 이야기 끝.

은 아니고, 오늘도 미리 계약된 제 몫의 노동력을 회사에 제공한 민은 돌아올 부의 분배를 기대하며 볼풀과 사과가 기다리는 집으로 향했다. 민은 콧노래를 부르며 지하철 승강장 앞에 섰다. 민의 뒤로도 사람이 족히 일곱 명은 줄지어 서 있었다. 그런데 이때, 민의 가방에서 플라스틱 공이 튀어나와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하지만 민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고, 도착한 지하철에 타려다가 그대로 공을 밟고 뒤로 자빠졌다. 이어 민의 뒤에 서 있던 사람들까지 도미노처럼 줄줄이 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어?”, “어…”, “어.”, “어!”, “얼”, “억”.

마지막 사람이 지하철 벽에 부딪히며 쓰러질 때까지, 그 줄과 옆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서로를 부여잡고 외마디 비명을 남기며 넘어졌다. 그들이 끙끙거리고 서로 버럭 화를 내고 민에게 소리를 치는 동안 지하철은 미련 없이 승강장을 떠났다. 민은 성난 사람들을 향해 멋쩍게 웃어 보였다. 쏟아지는 비난을 적당히 모른 척하며 바닥에 떨어진 공을 주웠다. 그건 민이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그렇게 민은 다음 지하철을 문제없이 타고 집에 도착했다. 매일 열한 시면 잠에 들었기에 남은 하루는 세 시간 정도였다.

대강 씻고 나온 민은 물을 끓여 컵라면에 붓고 냉수 한 컵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가방에서 플라스틱 공을 꺼내 알코올 소독제로 뽀득뽀득 닦아 잠옷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틀어놓은 텔레비전에는 독서 예능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었다. 민은 컵라면 뚜껑을 열고 젓가락으로 아직 덜 풀어진 면을 뒤섞었다. 후끈한 김이 올라오며 안경알이 뿌예졌다. 그때, 텔레비전에서 누군가 말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우리 삶이 끝없는 ‘한편’이라는 거예요. 이 얘기 좀 하다가 다른 얘기, 그리고 또 다른 얘기를 해야 해요. 사실 논지를 이탈했다고 해서 죄를 지은 건 아니거든요. 좀, 낡은 플롯들은 폐기할 필요도 있고요. 나무의 잔가지는 그늘을 만들고, 그걸로 행인들의 쉴 곳을 마련하잖아요. 그 잔가지에서 난 잎들이 광합성을 하니까 생존에도 도움이 되고요. 결국 잔가지를 모두 쳐내는 건 나무를 위한 일이 아니라는 거죠. 잔가지 없는 나무는 내다 팔기에나 좋습니다. 생명이 아니라 상품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늘, 아무리 염치가 없어도 꿋꿋하게 외치셔야 해요. 한편, 그럼에도 내 삶은 다르게 흘러갈 것이라고요.”

그는 열변을 토했으나 민은 한마디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민은 안경을 벗어 던지고 라면을 먹어 치웠다. 빠르고, 정확하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작가의 말

“이 글은 일상의 자동성, 노동과 자기만의 의례, 그리고 플롯의 해체에 대한 이야기야. 민은 기계적인 삶 속에서 자기만의 리듬과 서사를 구성하려는 존재고, 그 삶은 무의미해 보이면서도 반복 속에서 점점 자기만의 색을 띄기 시작하지. 이 글은 ‘하찮음’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삶을 관찰하는 아주 유려한 시선을 갖고 있어. 문체는 무심한 듯 유려하고, 감정은 절제되어 있지만 흐르지. 아무도 특별하게 여길 것 없는 하루가, 누군가의 민중 서사로 격상되는 순간이 담겨 있어.”라고 ChatGPT가 평해주었답니다. 땡큐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