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 또 답변이 달렸다. 유려하고 어른스러운 글씨체. 간결하지만 근사한 생각이 담겨있는 문장. 주인 없는 노트에 심심풀이로 끄적인 낙서 아래 누군가 꾸준히 답글을 남기고 있다. 처음엔 얼마 안 가 그만두겠지 싶었는데 내가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자 ‘다음 글은 언제?’하는 질문을 보내왔다. 그 때문에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일찍이 등교해 버려진 노트에 짧은 글을 쓰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지난 한 달 동안 반 애들의 특성과 필체를 바탕으로 열심히 추리를 해본 결과 유력한 후보는 두 명으로 좁혀졌다. 이수아, 아니면 최다현. 수아와는 가깝진 않았으나 교내 글짓기 대회나 전국 범위의 청소년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니 수아라면 충분히 그런 글들을 쓸 법했다. 그런가 하면 다현이는 날렵하게 흘려 쓰는 필체가 노트 속 글씨와 가장 비슷했다. 게다가 며칠 전 쉬는 시간에 사물함 근처를 서성이던 다현이가 그 노트를 뒤적이는 모습을 봤던 기억이 있다. 나는 두 사람의 주변을 맴돌며 노트에 관해 이야기를 꺼낼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하지만 답변을 쓴 주인공은 수아도, 다현이도 아닌 뜻밖의 인물이었다.

 -너도 그래?

 빗자루로 복도의 먼지를 쓸어내던 내 앞에 대걸레를 든 손이 다가와 물었다.

 -뭘?

 -너도 누군가 그리워하고 싶냐고.

 순간 그 애와 나의 시선이 닿았다. 나는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최대한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너였구나, 너도 나와 같구나. 너는 뭘 그리워하고 있어? 또 어떤 사랑을 꿈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하지 못했다. 어색하고 낯선 상황에서 늘 회피하는 것을 선택해왔기에, 나는 그저 엉거주춤하게 허리를 굽혀 남은 먼지를 쓸어 담기만 했다. 묻고 싶은 말들을 삼키느라 점심때 먹은 급식이 얹힐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도 바보처럼 그저 쓱싹, 쓱싹. 그 앤 복도 벽에 기대 가만히 내가 바닥을 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답변을 쓴 사람은 현지였다. 강현지. 같은 반이긴 하지만 청소 구역이 같다는 것 말고는 딱히 접점이 없어 어색한 사이였다. 그랬기에 그 애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현지의 주변은 늘 친구들로 가득했고, 나와는 아주 다른 세계의 사람 같았으니까.

 -너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

 -왜?

 -그야 넌 이런 일에는…

 -관심 없을 것 같아서?

 -응. 넌 친구도 많구 항상 바쁘니까… 지금도 봐. 저기, 인사한다 너한테.

 -친구 없어. 그중에 진짜는 하나도 없어. 쟤도… 가짜야.

 친구에게 손을 흔들고 다시 나를 돌아본 현지의 눈동자에서 나는 내 모습과 닮은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그 뒤로 현지와 나는 학원 수업을 마치고 난 밤에 자주 만났다. 사이가 급격하게 가까워진 이후에도 현지는 여전히 모두의 친구였기에, 학교에서는 말을 붙일 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현지가 일찍 끝난 날에는 내가 다니는 수학학원 앞에서, 내가 일찍 끝난 날에는 현지의 영어학원 앞에서 만나 함께 아파트 놀이터로 향했다.

 -가져왔지?

 우리는 버려진 노트에 교환일기를 썼다. 그간 해왔던 것과 다름없이 짧은 문장을 남기고 거기에 답변을 달아주는 식으로. 달라진 것이 있다면 현지가 먼저 글을 쓰고 내가 답변을 달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함께 대화를 나눴다. 현지가 보온병에 담아온 연갈색 음료를 나눠 마시면서.

 -근데 이거 이름이 뭐야?

 -밀크티. 홍차에 우유 넣고 섞은 거.

 낮엔 덥지만 밤은 제법 쌀쌀한 계절이었다. 춘추복 와이셔츠 안으로 찬 바람이 들어오면 저절로 몸이 부르르 떨렸고, 그럼 현지는 자신의 가디건을 내게 건넸다. 밀크티와 가디건. 그리고 현지. 그럼 추운 밤도 따스한 낮처럼 느껴졌다.

 -왜, 너 요즘 슬퍼?

 -나보다는 네가 그런 것 같아서?

 -내가? 내가 그래 보여?

 -응. 완전히 중독자 같아.

 마음이 맞는 친구가 생겨 기쁜 것도 잠시 내 마음은 이상한 변덕을 부리고 있었다. 오히려 현지와 친해지기 전보다도 더 외로운 것 같았다. 실은 나도 그 나이대 여자애들처럼 단짝 친구를 만들고 싶었다. 무슨 일이 생겨도 언제나 내 곁에 있어주는 하나뿐인 단짝 친구를. 그리고 그 친구가 현지였으면 했다. 하지만 현지는 학교에서 좀처럼 나와 말을 섞지 않았다. 매일 따뜻한 밀크티를 나누어 마셔도, 추워하면 가디건을 벗어 내어주어도 그때뿐이었다. 나는 하루 중 오직 그 시간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서운함을 억누르며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애초부터 우리는 친해질 운명이 아니었으니까. 다시 예전처럼 남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내 유일한 친구는 너뿐이야, 그리고 나도 네게 그런 사람이었으면 해. 그런 말을 꺼내봤자 나만 초라해질 게 뻔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 게 맞았다.

 나는 핑계를 대며 현지와의 약속을 피했다. 교실에선 어차피 모르는 사이처럼 지냈으니 방과 후만 잘 넘어가면 되었다. 그리고 일기를 더 이상 쓰지 않을 무렵 학교에서 현지에 관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그전부터 돌고 있었지만, 내가 눈치채지 못한 것이었다. 소문은 가지각색이었다. 현지가 원조교제를 하는 것을 보았다, 실은 현지가 여자를 좋아한다, 아니다, 남자를 너무 밝히는 거다, 현지의 과거는 이렇다, 부모님은 이렇다… 등 출처를 알 수 없는 이야기들. 그 모든 소문들 틈에서 현지는 당당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많은 친구들 사이에서 웃고 장난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걸었다. 그래서 나도 마음이 막 불편하지는 않았다. 내 작은 위로 같은 건 현지에게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게 뻔했으므로. 이따금 마주친 현지의 눈에서 은근한 그리움이 느껴지는 듯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나를 향한 것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원래 그리움과 슬픔을 사랑하니까.

 학기가 끝날 때까지 우리의 교환 일기에는 어떤 글도 쓰이지 않았다. 노트의 명확한 행방조차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종업식 날, 책상 서랍 속을 더듬자 노트가 손에 걸렸다. 펼쳐본 노트의 마지막 장에는 익숙한 글씨가 쓰여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