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여기서 이러면 안 돼.

눈을 뜨니 집 앞 버스정류장이었다. 나를 흔들어 깨운 등산복 차림의 할머니 뒤로 어스름한 새벽하늘이 그려졌다. 스멀스멀 더디게 현실감각이 돌아왔다. ‘1번 버스가 곧 도착합니다.’ 기계음이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니 작은 전광판이 보였다. ‘07:19’ 멀리서 정장이며 교복을 갖춰 입은 사람들이 하나둘 걸어오고 있었다. 몸을 일으켜 앉자 욕지기가 솟아 고개를 도로 푹 떨궜다. 양손으로 머리를 싸매고 한참 숨을 몰아쉬었다. 숙취 때문인지 추위 때문인지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술 냄새가 지독했다.

집에 들어가지도 못할 정도로 술을 퍼마셨냐고? 천만에, 나는 그럴 친구가 없다. 술은 우리 집 거실에서 혼자 마셨다. 안에서 취해 밖으로 기어 나온 거다. 버스정류장에서 마주치고 싶은 남자가 있어서…

*

지친 몸을 끌고 돌아간 집은 냉랭하고 축축했다. 활짝 열린 창문에 얇은 커튼이 을씨년스럽게 나부꼈다. 그 밑으론 간밤에 어질러놓은 술병이며 과자 봉지가 널브러져 있었다. 집을 수습해야 했다. 따듯한 물로 몸부터 덥히고 싶었지만… 뭘 잘했다고 그런 호강을 해? 나는 대충 소파에 있던 담요를 어깨에 걸치고 바닥에 떨어진 맥주캔을 주웠다. 허리를 숙이자, 아까 밟은 은행 열매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우웨엑’

화장실로 달려가 속을 게워 내고 나자 한기가 몰려왔다. 어깨를 떨며 설거지를 시작할 때쯤 지난밤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정말이지, 거품이 묻은 접싯물에 코를 박고 죽고 싶었다.

대체 누굴 붙잡고 그런 소릴 한 걸까.

“보고 싶어요. 곁에 있어 주면 안 돼요? 그래요. 나 그쪽 몰라요. 그래도 당신한테만 털어놓을 수 있는 마음이 있단 말이에요. 우린 닮았어요. 진짜 비슷해. 없어요. 그쪽만큼 나랑 잘 맞을 사람이. 그걸 왜 몰라…”

내가 이 꼴이 된 건 다 그 사람 때문이다.

작년 가을, 마을버스에서 그를 처음 마주쳤다. 영화를 보러 가던 길이었다. 라디오에선 산울림 노래가 흘러나왔고, 지는 햇빛이 버스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승객을 태우기 위해 잠시 정차한 그때, 멍하니 있던 내 시야로 그가 들어왔다.

그는 창가 자리에 앉아 시집을 읽고 있었다. 옆에 앉은 아주머니는 눈을 찌르는 햇빛이 불편한지 인상을 찌푸리더니, 손을 들어 이마에 가져다 댔다. 옆을 흘깃 본 그는, 우선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고, 조용히 몸을 기울여 아주머니 얼굴 위로 그늘을 만들었다. 그에게 가로막힌 노을빛이 그의 단정한 머리칼과 뺨, 갈색 눈동자, 나무색 니트 위로 부드럽게 스며들었고, 나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우리는 같은 정류장에서 내려 같은 건물로, 같은 영화관의 같은 상영관으로 걸어갔다. 검은 배낭에 달랑거리는 버섯 인형이, 한발 앞선 발길에 내 것과 같은 브랜드의 부츠가 눈에 띄었다.

그날 이후 버스를 탈 때마다 그를 찾았다. 그러다 우리가 출퇴근 시간, 마을버스에서 내린 뒤 지하철로 환승하는 동선까지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렇게 가을, 겨울, 봄, 여름… 다시 10월에 이르렀다.

그는 이런 사람이었다. 출근길 만원 버스에서 아이가 울어도 엄마를 쳐다보거나 한숨 쉬지 않았다. 옆 사람이 기침을 하면, 추울 땐 창문을 닫고 더울 땐 에어컨 바람을 줄였다. 누군가 부딪히지 않도록 가방은 항상 가슴팍에 끌어안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남들 바지에 젖은 우산이 닿지 않게 하려다 제 옷을 다 적셨고, 옆에 앉은 할아버지가 부르륵 방귀를 뀌어도 코를 틀어막지 않았다.

지하철에서 그는 자주, 책을 읽다가 수첩을 꺼내 뭔가를 끄적였고, 꾸벅꾸벅 졸다가 화들짝 놀라며 깨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밴드의 음악을 자주 들었고(핸드폰 화면 좀 훔쳐봤다. 일부러는 아니고, 어쩌다 보일 때만…), 무릎에 돈을 구걸하는 쪽지가 얹어지기라도 하면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죄송해요’라며 두 손으로 쪽지를 돌려드렸다. 늦은 밤, 술 취한 아저씨가 어깨에 기대 잠들어도 싫은 내색하지 않았다. 가끔은 한 손에 이어폰을 들고 어르신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런 그를 위해, 나도 조용히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했다. 출근길, 지각한 그가 멀리서 달려오면 가야 할 버스를 잠시 붙잡았다. 부러 두리번거리고, 느리게 올라타고, 기사님께 웃으며 인사말을 건넸다. 퇴근길, 그가 내려야 할 곳에서 졸고 있으면 헛기침을 해서 깨우고 딴청을 피웠다. 여름이면 그가 서 있는 쪽으로 몰래 에어컨 방향을 돌렸다. 그의 안색이 좋지 않은 날엔 내가 그나마 아는 신에게 간절히 빌었다, 그 사람이 행복하게 해달라고.

그가 동네에서 자취를 감춘 건 2주 전이다. 버스, 지하철, 동네 영화관 어디에서도 그를 찾을 수 없었다. 생각했다. 결국 이사를 갔구나, 나는 아무것도 해보지 못했구나. 지난겨울엔 매일 주머니에 핫팩을 넣고 다녔었다. 매번 코끝까지 빨개져 손에 호호 입김을 부는 그에게 주고 싶어서. 줄까, 줘도 되나. 주면 반가워할까. 핫팩 때문에 인사하는 사이가 되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하지. 어쩔 줄을 몰라 핫팩을 흔들기만 했었다. 추워서 동동거리는 발이 신경 쓰였다. 그게 안쓰럽고, 귀엽고…

그러다 어제 그 사람을 마주친 거다. 집에서 한 시간 거리나 떨어진, 서울 한복판의 독립영화관에서. 상영이 끝나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그가 바로 뒷줄에 앉아 있었다. 그는 무심히 눈을 피했고, 단지 나를 스쳐 지나갔다. 붙잡아 볼까 했지만…

나는 멈춘 곳에서 벗어나 원래 가던 길을 다시 걸으려 했다. 4호선에 탄 동안에도 울렁거리는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다. 마을 버스로 갈아탔을 때, 결국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동네 풍경 위로 그의 모습이 겹쳤다. 운명의 상대를 만날 거라던 인터넷 타로는 허무맹랑했다. 이 감정을 오락이나 유희 정도로 치부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속이 공중에 붕 띄워졌다가 지하로 내리꽂혔다. 그래서 술을 마셨다. 뭐라도, 뭐라도 해야 했으니까.

늘어진 과자봉지 사이로 일기장이 펼쳐져 있었다. 거칠게 휘갈긴, 부치지 않을 편지.

“당신의 안부를 물어요. 저는… 저는 누구냐면요. 사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요샌 아침저녁으로 날이 추워요. 자주 하던 회색 목도리 챙기시고, 겉옷도 단단히 입으셔야겠어요. 핫팩을 한 박스 주문해 두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좋아해요. 제게 이런 말을 할 자격은 없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