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1000 역시 실패, 새로운 땅으로의 도약은 불가능할 것인가!」

 아침 뉴스에 올라온 소식은 언제나와 다름없었지만 언제나보다 절망적이었다. 오늘의 뉴스는 A부터 S까지인 19,000개의 듀플리들이 블랙홀에 갈기갈기 찢겼음을 공표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새로운 듀플리 개체인 T-1이 희생될 차례가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S-1000이 실패하리라 예상한 제닌 행성의 과학자들은 S-497을 보낼 때쯤에 이미 T개체 제작을 완료했다.

 제닌 행성은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별이어서 자꾸만 화산 폭발과 지진이 일어나 거주하기 힘든 별이 되었다. 제닌의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는 제닌을 벗어나야 했다. 수많은 과학자들은 이주할 별을 찾기 시작했으나, 우주 방정식을 풀면 풀수록 제닌 행성의 결말은 긍정적인 동시에 절망적이었다. 제닌 행성과 유사한 환경을 가진 별이 멀지 않은 곳에 존재했고 100년에 걸쳐 테라포밍 과정을 거치면 제닌과 90% 유사하게 다듬을 수 있었다. 절망적인 사실은 블랙홀이 제닌 행성과 그 별 사이를 굳건히 막고 있다는 점이었다. 모두가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죽음을 무릅쓰고 블랙홀을 넘어가야 했다. 더욱 절망적인 사실은 일반적인 블랙홀보다 훨씬 빠르게 회전하는 블랙홀이어서 에르고 영역–블랙홀을 탈출할 수 있는 속도가 광속이 넘는 영역-이 다른 블랙홀에 비해 넓었다. 넓은 영역을 광속 이상의 속도로 나아가는 일은 에너지 활용 상 불가능했다. 수많은 수식과 수많은 방법론은 다 쓰레기통으로 던져졌고 가능성 있는 방법론조차 운이 따라야만 미약하게나마 실현 가능하였다. 제닌의 과학자들은 행운이 따르길 바라며 일부 방법들을 시도하기 위해 ‘듀플리’를 만들었다. 블랙홀을 건너기 위해 나섰던 첫 사람의 세포와 유전자를 모방하여 만든 인간 형태 개체인 듀플리는 사실상 첫 사람, 테린의 복제품이었다. 알파벳당 1000개의 듀플리가 제작됐고 S-1000이 될 때까지 듀플리들은 찢겨서 블랙홀로 빨려들어갔다. 이제는 T개체가 블랙홀을 건너야 하는 차례가 되었다.

 T-1은 S-497의 연락이 두절되었을 때, 눈을 떴다. 이미 자신과 키, 체중, 얼굴, 점, 모든 게 똑같은 것들이 시야를 꽉 메우고 있었다. 눈을 뜨기 전부터 흘러 들어와 뇌에 박힌 정보들을 기반으로 T-1은 저 많은 똑같은 것들, S들이 자신과 동일한 개체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자신의 옆에 놓인 50개의 플라스크도 곧 자신과 같은 개체들이 될 거라는 판단도, 이 많은 알파벳과 숫자들의 나열로 칭해지는 것들이 자신과 다를 바가 없는 것들이며, 비슷비슷한 운명을 마주할 것들이라는 사실도 역시 쉽게 판단 가능했다. 딱 하나 T-1이 S들과 달랐던 점은 식사-훈련-식사-훈련-식사-훈련-취침이라는 빡빡한 생활 패턴에 쉬는 시간이 생겼다는 것 뿐이었다. 불안 조절 훈련을 맡던 담당자가 일을 그만두면서 채용에 실패해 생긴 공백을 다들 지친 나머지 내버려두다 얼떨결에 생긴 쉬는 시간이었다.

 T-1은 식사와 훈련을 반복하다가 고작 아침, 저녁의 1시간 쉬는 시간만 되면 곧 블랙홀로 출발할 나머지 S들을 창밖으로 구경하거나 연구소 앞의 작은 정원의 잔디를 밟으러 나갔다. 아주 가끔 도서관에 들어가 창고에 박힌 소설책들을 몰래 읽다가 연구원들에게 혼나기도 했다. T-1은 훈련이 지루했다. 식사 같은 건 필요 없으니 당장 밖으로 나가서 햇빛 아래서 피부가 따가운 감각을 느끼고 싶었다. 에어컨 바람이 아니라 무더운 여름 바람을 쐬고 싶었다. T-1은 종종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훈련을 받는 이유는 뭐지?”, “나는 왜 블랙홀을 넘어야만 하지?”, “식사를 제대로 챙겨 먹지 않으면, 체형을 유지하지 못하면 왜 혼나야만 하지?” 등등. T-1을 이을 T개체들이 서서히 완성될 때쯤, T-2가 눈을 떴고 T-3는 눈을 뜨기 직전이었다. T-2의 완성에 맞춰 불안 조절 훈련을 맡을 연구자도 채용돼 T-1의 쉬는 시간도 자연스레 종결되었다.

 사라진 쉬는 시간은 T-1을 소위 ‘문제아’로 만들었다. T-1은 오로지 쉬는 시간을 위해 훈련을 받고 식사를 하던 개체였으나, 자신의 행동에 대한 목적이 사라지면서 T-1은 무기력해졌다. 성실히 훈련에 참여하지 않는다거나, 훈련 담당 연구자에게 “이거 왜 해야 합니까?”라는 당황스러운 질문을 던진다거나, 배급받은 식사를 바닥에 떨어뜨리곤 실수인 척을 한다던가, T-1은 다른 개체들과 다른 돌발 행동을 해 댔다. 연구자들은 T-1을 빨리 우주로 보내고 싶어했다. 이런 불성실한 개체가 블랙홀을 넘을 리 없으니, 그냥 빨리 우주로 보내 눈앞에서 치워버리고자 했다. T-1은 연구자들이 자신을 곤란해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S-895가 출발할 때쯤, 자신이 슬슬 우주로 떠나야 할 시기가 왔다는 사실도 알았다. T-1은 S-900이 우주로 떠나자마자 훈련을 거부했다. 무기력하고 약간의 반항은 있었지만, 훈련 자체를 거부한 적은 없었기에 연구자들은 T-1이 드디어 고장났다고 판단했다. 연구자들은 T-1을 실패작이라 생각하고 T-2의 훈련을 빠르게 진행하여 T-1과 T-2를 함께 보내기로 결심했다. T-1에 투입된 자본과 그에 따른 투자자들의 기대를 무시할 순 없어서 폐기하지 못한 결론이 결국 두 개체를 함께 보내는 선택이었다. 제논 소식지에는 연구소의 새로운 도전적 결정이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났고 T-1은 계속 훈련을 빠졌다. 그렇게 출발 전 하루가 되었다.

 T-1은 쉬는 시간이 사라진 이후부터 생각이 복잡했다. 잘하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 희망, 바람이 몸을 꽉 채우다가도 절대로 이 살인 공장 같은 시스템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거라는 절망, 우울, 비극이 희망들을 짓눌렀다. 죽어야 하는 운명이지만, T-1은 살고 싶었고 그 나름의 반항으로 훈련을 빠졌다. 그러나, T-1의 반항에도 블랙홀로 떠나야 하는 일을 피할 순 없었다. 결국 T-1에게 출발 명령이 떨어졌다.

 T-1은 출발 전날의 밤이 되어서야 결심을 했다. 블랙홀로 떠나야 할 운명을 받아들였다. 블랙홀을 넘어도 새 행성과 제닌까지 통신, 이동, 이것저것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운 좋게 한 번 성공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의문밖에 없는 행위임에도 T-1은 자신이 실패하든 성공하든 수많은 T듀플리와 U듀플리와…Z듀플리가 부서질 때까지 이어질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T-1이 필연적이고 절망적인 운명을 받아들이자, 자연스레 희망을 버리게 되었다. 희망을 버리자 T-1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T-1은 내일, 우주선을 타기 위해 잠을 청했다.

 다음날, T-1과 T-2가 우주선을 타기 3시간 전이었다. T-1과 T-2는 우주복을 다 입고 우주선에 탈 준비를 하고 있었다. T-1이 훈련을 빠지긴 했지만, 필수 훈련과 조작법은 다 익히고 있었기에 제1 조종사로 임명되었다. 어느 정도 우주선 세팅이 끝나자, T-1이 먼저 우주선으로 들어갔다. T-2는 혹시 모를 T-1의 돌발 행동에 대비하여 추가 안내사항을 받으러 연구실로 불려갔고 T-1은 이때를 틈타 계기판을 만졌다.

 바로 눈앞에 전원 버튼이 있었다.

 T-1은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12:26. T-1이 자유로워질 시간이었다.

 버튼은 붉어졌고 T-1은 블랙홀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