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인생이 무릇 쓸쓸하고 헛된 것일지라도, 촘촘하게 흘러온 지난 삶이 값진 의미를 갖게 되는 날이 기어이 올 것이다. 그래, 나쁘지 않게 잘 살았다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날. 그 어느 날에 나는 악덕한 세상을 비롯한 모든 것을 용서하고, 비겁했던 내 죄를 돌아보고. 무엇을 망설여 그리 아껴왔는지 모를 내 안에 품은 사랑의 마음들을. 증오와 그리움과 미운 마음들을 모두 비워낼 수 있으리라, 마침내 자유로워지리라. 그런 생각을 했다. 소년은 그런 날을 간절히, 아주 간절히 바랐다.

*

 온. 그건 온의 첫 번째 생에서 온의 아버지였던 소년이 지어준 이름이었다. 온이 태어났을 때쯤 가진 게 아무것도 없던 소년이 부디 제 자식만큼은 세상의 온갖 것을 누리고 살기를 바라며 지어준 이름이었다. 그리고 온은 소년의 전부를 누렸다. 소년은 갓 스물에 아버지가 되었고 다정한 눈으로, 뽀얗고 따뜻한 손으로, 말간 웃음으로, 서툰 마음으로 온을 있는 힘껏 키웠다.

 그러나 온은 얼마 살지 못하고 일찍 죽어버렸고 전부를 내주려던 아버지를 기어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청년으로 만들었다. 그게 온의 짧은 첫 생애였고, 온과 소년의 첫 인연이었다 그 이후 네 번의 윤회를 거치는 동안 온은 소년을 줄곧 아버지로 기억했다. 소년의 손등이 부드럽고 하얬을 적부터 검게 그을러 갈 때까지, 단단했던 골격이 어느덧 약해지고 작게 움츠러들 때에 이르러서도 온은, 첫 생애에서 저를 쓰다듬던 소년의 어린 손아귀를 자주 떠올렸다.

 매 생애 오직 소년만을 좇았다. 딸로, 우연한 손님으로, 스쳐가는 바람으로, 고양이로. 온이 매번 단명하는 삶을 반복하는 동안에도 소년은 내내 한 자리에 머물렀기 때문에 온은 언제나 소년을 쉽게 찾아갔다. 그러는 동안 온의 눈에 소년은 항상 소년이었다. 소년이 처음으로 허름한 경차를 장만해 도시 중심지로 차를 끌고 갔을 때를 기억한다. 서른이 채 덜 되었던 소년의 눈동자는 도시의 낯선 광경을 두리번거리며 거침없이 반짝였다. 교차로 한가운데 서서 호루라기를 불며 교통 정리를 하는 남성의 늠름한 몸짓을 동경의 눈빛으로 쳐다보던 얼굴. 한껏 빼입고 거리를 누비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가슴이 콩닥거리던 소년의 앳된 마음. 온은 그걸 내내 다 보았다. 소년이 소년이던 시절을. 그래서 보아도 보아도 아까웠던 소년의 시절을.

 소년이 머리가 벗겨지고 배부른 아저씨가 되어 화만 부쩍 늘었을 때에도, 머물거나 흘러가는 인연들에 다정하지 못하고 애꿎게 미운 짓을 할 때에도 온은 그를 소년으로 기억했다. 소년이 드라이브를 인생의 유일한 낙으로 삼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에는 바람으로 환생해 그의 곁을 지켰다. 마음이 갑갑하고 화, 인내, 고독 같은 것이 넘쳐흘러 이리저리 방랑하는 기분일 때마다 소년은 낡은 차를 끌고 교외 드라이브를 나서곤 했다. 그럴 때 온은 선선하고 부드럽게 불었다. 소년이 잠시나마 우뚝 서서 모처럼 평온한 바람결을 음미하도록, 그렇게 바람이 되어 소년을 에워쌌다. 그게 온의 세 번째 생애였다.

 네 번째 생에 온은 고양이로 태어났다. 마음껏 소년의 품에 머리통을 비빌 수 있다는 사실에 온은 제법 흡족했다. 그 무렵 소년은 머리칼이 하얗게 새기 시작했으나 행동거지는 다시금 소년으로 돌아간 듯 했다. 때때로 소년 시절의 활기 어린 눈동자를 띄기도 했다. 애틋한 사람들에게 시시한 장난을 치고는 낄낄대고, 금목서 향기에 발걸음을 멈춰 가을 내음을 맡기도 하고, 바람이 풀들에 스쳐 사락거리는 소리에 왠지 한없이 물러지는 마음을 움켜잡기도 했다. 그런 소년의 모습이 귀여워 보였다. 온은 그럴 때마다 제 매끄러운 털을 쓰다듬으라며 몸통을 소년에게로 불쑥 내밀었다. 그러면 소년은 풀어진 입꼬리를 감추지 않고 온을 투박하게 문질렀다. 그 무렵 소년과 온은 서로를 귀여워했다.

 하루는 소년이 잠에 들지 못하고 방을 서성이던 날이었다. 돌아가신 어머니 사진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소년의 뒷모습을 온은 오래된 요를 덮은 채 올려다보았다. 문득 소년이 여전히 자라는 중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칠순이 넘은 소년의 몸집이 날이 갈수록 작아져서일까. 소년이 아직 무럭무럭 자라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온은 그날, 이번 생에는 소년의 곁을 더 오래도록 지켜야겠다고 마음 먹었고 실제로 온은 그날로부터 정확히 5년을 더 살아냈다. 고양이로서는 퍽 긴 생애였다. 특히 온에게는 그랬다.

 고양이의 영혼이 마지막 잠에 들던 찰나에 온은 빌었다. 하루만 더 살게 해주세요. 온은 네 번의 생애 동안 가장 꿈꿔왔던 영물의 모습을 떠올렸다. 흰 나비. 가냘프고 굳센 날갯짓이 참으로 멋지다고 생각해 왔다. 나비로, 흰 나비로 소년의 곁에서 하루만 더 살게 해주세요. 온은 그렇게 빌며 고양이의 눈을 감았다.

*

 그런 날들이 많아진다. 하늘이나 산, 강가처럼 저 멀리 있는 것들을 그저 우두커니 바라보는 날들. 소년은 제 아버지의 무덤 옆 푸성귀들 위에 풀썩 앉은 채로 시간을 보내는 걸 좋아했다. 그 자리에 앉으면 추수를 막 끝낸 들판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그 들판은 손바닥 안에 잡힐 듯이 작아 보이다가도 불현듯 끝도 없이 넓어 보이곤 했다. 오늘은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게 한참 멀게만 느껴졌다. 영원히 손에 닿을 수 없는 환상처럼 아득했다.

 그 속에서 흰 나비가 소년 곁으로 힘차게 날아왔다. 꼭 머나먼 길을 거쳐 온 듯한 몸짓이었다. 노을이 들판에 내려앉아 소년의 얼굴에 붉은 빛이 드리워졌고 그 위로 나비가 마지막 날갯짓을 선사했다. 소년에게. 그립고 그리운 소년에게. 애틋하고 안쓰럽고 보고 싶었던 소년에게 나비는 제 전부를 건넸다. 소년은 오묘한 눈빛으로 나비의 펄럭이는 몸통을 바라보다 나직이 속삭였다. 아부지가 나 보러 왔는갑소. 나비의 찬란한 무대의 마지막 관객이 되어 한참을 그렇게 속삭였다. 나 보러 왔는가봐. 그래, 나 보러 왔는가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