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소리들이 있다. 예를 들면 사과 한 상자를 만 팔천 원에 팔던 과일 트럭 사장님의 두꺼운 목소리. 지날 때마다 역 이름을 뒤따라 나오는 소월한방병원의 광고 멘트. 내 귀를 간질이던 수연의 음성. 낮게 웅- 하고 울리던 놋그릇 소리.

며칠 전부터 내 머리 간을 맴돌던 소리는 수연의 천진한 음성이었다. 누런 놋수저에 얼굴을 갖다 댈 때마다 풍기던 비릿한 냄새와 함께. 우리는 수연의 자취방에 마주 앉아 묵사발을 떠먹고 있었다. 고소한 깨가 살얼음 곁을 고요히 맴돌고 가지런히 결을 낸 묵이 차갑고도 탱글했던.

 나 묵병에 걸린 것 같아.

 막 직장인이 된 수연은 집들이 메뉴로 묵사발을 내놓은 이유를 설명하며 그런 말을 했다. 요즘따라 유독 묵이 들어간 음식들이 자꾸 생각난다고. 그런데 특정한 음식이 계속 떠오르고 먹고 싶다면 그건 단순히 그 사람이 먹보라서가 아니라 병에 걸린 거라고. 그래서 본인은 묵병에 걸렸고, 며칠 전부터 묵사발, 도토리묵, 묵전병 등등 묵에 관한 음식들을 찾아보고 최대한 묵으로 만든 음식을 먹으며 살고 있다고 했다. 평소 생각도 못 하던 놋수저와 놋그릇 세트를 들이게 된 이유도 그 병에서 비롯되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우린 그걸 병에 걸렸다가 아니라 좋아한다고 표현해,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수연의 얘기를 끊지 않으려고 애썼다. 잠자코 기다리다 수연이 말을 마칠 때쯤 옅게 웃으며 ‘얘, 그런 건 세상에 없어.’ 하고 답했다. 그냥 첫 직장에 적응하느라 지쳤던 거라고. 게다가 지금 계절도 바뀌고 있어 더 그런 거라고. 헛된 상상을 바르게 고쳐주면서도 혹여나 내가 모르는 사이에 정말로 그런 병이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겨나, 말의 힘이 끝으로 갈수록 약해졌다.

수연은 싱겁게 맥을 끊는 내 말에 다행히 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고 보자, 너도 곧 나의 묵 세계를 기꺼이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와 같은 기세로 당당하게 자신의 묵 세계로 나를 초대했다.

“봄에는 녹두, 여름에는 옥수수, 가을에는 도토리, 겨울에는 메밀을 사용해 묵을 쑨다는 거 알아? 계절마다 다양하게 먹으면 절대 질릴 일도 없겠지. 내가 다른 병도 아니고 묵병에 걸린 건 정말 행운이야.”

수연은 정말로 자신이 행운에 걸린 사람 마냥 행복해했다. 자신이 묵병에 걸렸고 그 병이 행운이라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수연은 이어 한입 크기의 묵을 숟가락 위에 올려 입으로 가져가다 말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알던 도토리나 메밀 말고도 우뭇가사리, 청포, 고구마로도 묵을 만든대.”

좋아하는 아이돌 멤버를 소개하듯 묵을 쑬 수 있는 재료들을 나열했다. 우뭇가사리, 청포. 듣고 보니 꽤 예쁜 이름들이었다. 수연의 음성을 타고 나와서 그런가.

“응, 진짜? 그건 나도 몰랐네.“

“그리고 제일 대박인 거. 묵을 ‘쑨다’라는 표현. 정말 귀엽지 않아? ‘쑤다’는 표현이 들어가는 음식은 묵밖에 없다니까.“

흠. 쉽게 동의할 수 없는 의견이었다. 찾아보면 ‘쑬 수 있는’ 음식은 묵 말고도 많이 있을 것 같았다. 예를 들면 쑥? 쑥을 쑨다고 했던가. 쑥을 쑨다니, 소리 내 발음해 보면 재밌을 것 같아 소리 없이 읊조리니 정말로 쌍시옷을 발음할 때 입술이 울렁, 울렁거리는 게 꽤 재밌었다.

“곧 나도 묵을 쒀 보려고. 한 시간 동안 부지런히 저어야 한다지만 하나도 지루하지 않을 거야. 손을 잠시라도 놓으면 안 되기도 하고, 묵이 점점 걸쭉하게 변해가는 순간은 잠시도 놓치고 싶지 않거든.”

수연이 마치 자신이 쑤어지는 묵이 된 마냥 앉은 모양 그대로 몸을 씰룩 씰룩거렸다. 진지한 얼굴과 맞지 않는 엉뚱한 몸짓을 하는 모양새가 꽤나 우스웠다. 나도 질세라 팔까지 거들어 ‘이렇게? 이렇게?’ 하며 온몸을 들썩였고, 수연은 ‘아, 언니.’ 외치더니 깔깔 소리 내며 웃었다.

다시 묵사발을 한 숟갈 뜨는데 작은 묵 조각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만약 나도 묵병에 걸린다면? 묵병에 걸린 내 모습을 상상해 본다. 아침엔 따듯한 묵밥을, 점심으론 시원한 묵사발을, 저녁으론 매콤새콤한 묵무침을 먹는 나. 내가 아는 묵 요리는 세 끼로 동이 났지만, 묵이야 큰 맛이 없으니 딱히 크게 지겹거나 허전하지 않을 듯했다. 아마 수연 세상의 묵은 훨씬 찬란하고 알록달록할 테지.

 새 직장 생활은 어떤지 물으러 왔는데 생뚱맞은 묵 이야기만 신나게 하고 있었다. 직장은 어떤지, 힘들진 않은지, 혹여 묵이 직장과 무슨 관계라도 있는 건지 꼬리에 꼬리를 문 질문들이 꿈틀거렸다.

“수연이 너, 직장은 괜찮은 거고?”

“회사? 응. 생각보다 할만해. 다들 잘 챙겨주시고. 원래 신입은 할 일 없는 거 알잖아. 그냥 천천히 일 배우면서 적응하고 있어.”

“그래. 그럼 다행이다. 아직 배우는 단계니까. 곧 나아질 거야.”

“응. 고마워. 근데 것보다 우리 회사 근처에 진짜 맛있는 묵이 나오는 집이 있어. 메인 메뉴는 아니고 밑반찬일 뿐인데도. 사장님께 여쭤보니 묵만큼은 직접 쑤신다고 하시더라고. 역시 왠지 다르더라니까. 아, 그 묵 때문에 병에 걸린 건 아니고 그땐 내가 묵병이 맞는지 아닌지 헷갈렸던 때였어.”

또 튀어나온 묵 얘기에 아차 싶었지만, 회사 생활은 괜찮다는 말에 그럼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도 나중에 데려가라.”

수연이 소중한 비밀을 말하는 아이처럼 목소리를 낮추곤 속삭였다.

“당연하지. 언니도 깜짝 놀랄걸. 그 대신 나 말고 아무도 같이 가면 안돼.”

“싫어. 엄마 아빠 고모 현이 화선이 서린이 다 데려갈 거야.”

그 말에 수연이 눈썹을 팔(八)자로 만들며 슬픈 얼굴을 만들어 보이다 이내 킥킥 웃었다.

묵사발 한상을 깨끗이 비우고 나자, 수연이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과일을 건넸다. 예쁘게도 깎았네. 수연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손잡이 부분이 각진 포크로 배 한 조각, 사과 한 조각, 다시 배 한 조각을 찔러 열심히 우물거렸다.

*

입추가 지나고 아침저녁이 제법 쌀쌀해지니 시원한 묵사발이 아니라 뜨끈한 묵사발이 떠올랐다. 수연은 여전히 묵병의 행운을 누리고 있으려나.

 묵은 쑤어봤는지, 손목이 욱신거리지는 않았는지, 회사 생활은 어떤지, 감기에 걸리진 않았는지 꼬리에 꼬리를 문 질문들이 꿈틀거렸다. 트럭 아저씨는 이제 다홍빛 홍시 다섯 알을 오천 원에 내놓고, 소월한방병원 광고는 여전히 그대로인 파란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