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첩. 어제를 쌓아 오늘에 딛는다. 이별 없는 삶은 복일까 독일까. 어제의 내가 원망스러워 밤새 뒤척인다. 이불 부스럭거리는 소리, 낙엽 바삭대는 소리.

켭켭. 쌓인 낙엽은 건조한 날씨를 핑계로 자리를 이탈한다. 아무리 쓸어 모은들, 도로 사방으로 흩어진다. 휘청휘청 날아가 보도블록과 아스팔트 위 자태 뽐내는 적토색의 디바. 자유롭다, 누런 포대 자루 안에 쑤셔 박아 버리기 전까진.

꽉꽉. 비명을 지른다. 찢어진 낙엽들. 얘, 너 요가 하는 거 아니었어? 아, 아니네. 죽었구나. 그거 들었어? 인간들은 사실 우리를 미워한대. 배수구나 막는 쓰레기래.

*

가을을 핑계로 글 쓸 여유 따위는 없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삶은 최악을 달리고 있다. 1인분의 삶을 살아내는 이들이 경이롭다. 지난주까진 그런 생각을 했다.

  어제부턴 생각이 좀 달라졌다. 경이는 무슨, 다 불쌍해 죽겠네. 나도 불쌍하고 쟤도 불쌍하고 걔도 불쌍하고 그분들도 불쌍하고 그 새끼들도 사실 불쌍해. 평범한 한 사람이 짊어지는 슬픔의 양이 너무 크다. 안 그래? 나는 퇴근 후 기진맥진한 연수를 붙잡고 말을 쏟아냈다. 부대찌개를 그릇에 담던 연수는 동요 없이 내 눈을 얼마간 쳐다보더니, 건조하게 말했다. “너 요새 많이 힘드냐?”

  그래. 힘들다. 지친 이의 마음에 쓸만한 것이 싹틀 리 없었다. 요즘 내게 남은 건 염증, 피로, 남들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 사실 나조차도 어떻게 되든가 말든가 싶은 그런 멘탈리티. 나는 입을 다물고 맨밥만 깨작거리기 시작했다. 한참 식탁에 고개를 처박고 있으니 연수의 꾸지람이 날아왔다. “야 라면사리 다 불어. 밥에 국물만 적셔 먹지 말고 팍팍 좀 먹어”

  냄비를 다 비운 우리는 겉옷을 챙겨 입고 다시 거리로 나섰다. 찬 공기에 따끔거리는 살갗을 애써 어루만지며, 집을 향해 느리게 걸었다. 연수는 생각에 잠긴 듯 조용했다. 그 애 발에 툭툭 차이는 낙엽을 바라보다, 나까지 덩달아 상념으로 미끄러져 들었다. 적막을 깬 건 연수의 목소리였다.

  “애초에 1인분의 삶이라는 게 뭔데. 노동하고 있으면 1인분 아닌가.”

  잡생각에 몰두해 있던 나는 어렵지 않게 대화를 이었다. “아니지, 적어도 주 40시간은 일해야 1인분이지. 자기를 먹여 살릴 정도는 돼야 할 거 아니야.”

  그러자 연수는 경쟁적으로 말을 쏟아냈다. “나 참, 요즘 월급만으로 되나. 투자를 해야지. 사람이 집을 사야 해. 서울 집값은 계속 오른다? 인구가 줄어든다고? 그래도 서울은 안 망해. 서울 집값 떨어지면 우리나라 망한 거래. 아무리 그래도 나라가 망하겠냐? 대출 받아서 집 사야지. 너 나중에 은퇴하고 길거리에 나앉을 거야?”

  나는 걸음을 멈추고 연수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연수의 차가운 두 뺨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말했다.

  “야, 나는 아직 은퇴할 직장도 못 구했어.”

  연수는 나의 심각한 표정과 몸짓에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

키득거리는 우리 앞을 가로막은 것은 거대한 아파트 출입구였다.

  나는 더 수상하게 웃기 시작했다. 크크크크큭…힉히힉하학…. 연수가 미친 사람 보듯 쳐다봐 해명에 나섰다. “아니, 난 아파트만 보면 웃음이 나. 전에 건축 전시에 갔다가 아파트를 세로로 길게 자른 단면 모형을 본 적이 있는데, 침대 위에 침대가, 변기 위에 변기가, TV 위에 TV가 겹겹이 쌓여 있는 거야. 그러니까 아파트 생활자들은 밥 먹는 사람 위에서 밥을 먹고, 잠자는 사람 위에서 잠을 자고, 똥 싸는 사람 위에서 똥을 싸고….

  그 후로는 아파트만 보면 그런 생각을 해. ‘포크로 케이크 자르듯, 건물 한 귀퉁이를 딱 떠내고 싶다. 그러며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층층이, 어안이 벙벙한 채 나를 바라보겠지. 놀라는 표정마저 똑같을 거야. 비슷한 머리에 비슷한 몸 비슷한 피부색과 주름. 이 사람들이 다 같은 시간에 출퇴근을 하고, 비슷한 나이에 비슷하게 꾸며진 예식장에서 결혼을 하고, 또 비슷한 애들을 낳아서 비슷한 학교에 보내고. 비슷비슷하게 살고…. 비슷비슷한 생각을 하고….”

  그러자 연수가 타박하듯 말했다. “야, 그게 그렇게 쉽냐? 그 사람들도 다 자기 인생이 있어. 넌 어떻게 아파트가 웃겨? 우리 엄만 아파트만 보면 울어. 우리 동네 신축 아파트 있잖아. 엄마가 퇴근할 때 거길 꼭 지나야 하는데, 매번 그렇게 눈물이 난대.”

  “아, 너네 가족 10년간 살다가 재건축한 거기?”

  “어. 전셋집. 엄마가 어제는 친구네 집들이 다녀오더니, 가방 내려놓자마자 그러는 거야. ‘그 집이 영끌하느라 돈이 부족해 집이 휑하더라. 가구도 낡았고, 인테리어도 영.’ 내가 맞장구를 안 치니까 금세 풀이 죽어서는…. 아 속상해”

  “그래. 내가 철이 좀 없지. 그냥 해본 얘기야…. 어머니 그동안 맘고생 많으셨겠다.”

  짧은 산책을 마친 우리는 각자의 빌라로 흘러 들어갔다. 조심히 들어가, 어 잘 자, 하는 싱거운 인사만 나누고.

*

그날 밤 샤워를 하다가 내 발 밑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반지하의 특권이었다. 선사시대 움집에 살던 사람들처럼 땅을 딛고 살 수 있다는 거. 어쩌면 우리가 인류의 원형을 간직한 존재, 가장 순수한 인간일지도. 기술과 문명에 왜곡되지 않은, 제일 인간다운 인간…. 샴푸를 마칠 때쯤엔 내 헛소리에 나까지 지치고 말았다.

  샤워 후 변기와 화장실 벽의 물기를 닦으며 생각했다. 언젠가 나도 아파트를 비웃을 힘을 잃어버리겠지. 지금이야 철이 덜 들어 아파트에 사는 이들을 평이하다 비웃지만, 머지않아 그들의 장엄한 고군분투를 우러러볼 테다. 기회만 된다면 빚을 잔뜩 떠안고 아파트 매매 계약도 해야지. 감사하다고 사방으로 기도를 하면서…. 그러려면 일단 직장부터 구해야겠지. 버티고 또 버텨 내 명의의 집을 갖게 되면, 야 그날이 내 진짜 생일이다. 하지만….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틀고 나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첩첩이 쌓인 반찬통과 맥주캔. 맥주 한 캔을 꺼내 부엌 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파트가 싫다. 이유는 그냥, 취향의 문제. 왜. 그러면 안 되나? 한국에서 부동산은 사실 선택이나 취향이 아닌 생존과 신분의 영역이라? ‘급’대로 죽 늘어서 있는데, 그 줄에서 내가 좀 빠지겠다니 아니꼬운가? 그게 뭐 그리 큰 죄라고. 맥주를 꿀꺽꿀꺽 마셨다. 생각했다. 디바 같은 삶은 어떻게 사는 거지. 어떻게 해야 포대 자루에 쑤셔 박히지 않을 수 있지. 이 괴로움은 언제 끝나나. 진짜 삶은 언제까지 유예되나. 내가 나답게 산다면, 그건 소신인가 도태인가. 이 비루함을 어쩌면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