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웃는 날의 연속이었다.’로 시작하는 C의 일기는 3월 21일을 끝으로 아무 내용도 적혀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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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우 웃는 날의 연속이었다. 바쁘게(지우개로 지운 자국이 남아 있었다) 사는 건 내 적성이 아니었다. 시간을 쪼개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일은 영원히 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벽마다 도시락을 싸고, 아르바이트 시간을 맞추기 위해 바삐 계단을 오르내리고, 만원 버스에 실려 꾸벅꾸벅 밀린 잠을 부지런히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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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삶은 빈집이다. 아무런 향도, 색깔도 없는 삶은 사람 손길이 닿은 지 오래된 낡은 집. 외로이 등반하는 등산객처럼 홀로인 삶도 내게는 벅차기만 하다. 그 이상은 내게 허락된 일이 아니다.

  내 몫의 잠자리와 내 몫의 식량을, 내 몫의 안식처를 두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빽빽하고 칙칙한 세상에 내 몸뚱아리 하나 비집어야 한다. 그러나 이상하다. 내가 깎이고 낡아 갈수록, 겨우 모아 긁어낸 자존심을 버려낼수록 ‘꼭 이렇게 살아야만 살 수 있는 걸까’ 하는 모순적인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마치 닭과 달걀의 관계처럼, 내가 살아야 했기에 이렇게 사는 건지, 이렇게 살고 있어서 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에게 주어진 것은 무엇이 먼저였을까 고뇌하는 시간은 빽빽한 세상에 빼앗겨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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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 기상 알람이 울리면 저녁이 될 도시락을 녹색 보온 도시락에 담아냈다. 은행 앞 사거리를 지나칠 때마다 여러 번 마주했던 보온 도시락 광고가 문득 마음에 들어온 것에는 큰 계기가 없었다. 단지 내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손에 꼽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따뜻한 밥을 먹는 일이 선물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사실을, 플라스틱 도시락을 가지고 다녔을 시절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

  국가 지원을 받아 다니는 대학은 수업을 최대한 몰아 시간표를 짰다. 수업 외의 것에는 일절 관심을 두지 않기로 다짐했기에. 꺄르르 꽃 같은 웃음소리를 쏟는 무리에 귀 기울이지 않도록 잔뜩 긴장했다. 행여 푸른 진심이 새어 나올까, 제멋대로 쏟아져 버릴까, 함부로 꽃 피워 버릴까, 무미건조한 표정을 하고는 새파란 심장을 꾹꾹 눌렀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상가 유리문에 비친 내가 오늘따라 유독 작아 보였다. 또래보다 유난히 작은 키는 항상 나를 주눅 들게, 동시에 돋보이게 만들었다. 등장하는 순간 옅게 쏟아지는 께름칙한 관심에도 도망치지 않는 훈련을 해야 했다. 훈련이 잘되지 않는 날은 유독 작은 크기의 내 쳇바퀴를 비난해 댔다. 나만의 이론에 따르면 사람들은 저마다 주어진 쳇바퀴를 굴려 세상을 돌린다. 내 쳇바퀴는 남들보다 유독 작은 탓에 여러 번 굴려야 했다. 왜 나만 남보다 여러 번, 더 빠르게 굴려야 겨우야 박자를 맞출 수 있는 걸까. 행여 그게 나의 작은 키 탓은 아닐까.

  관심이 익숙해진 요즘도 가끔씩 벅찰 땐 키 탓을 한다. 남들보다 낮은 시선 때문일까. 그래서 이런 걸까. (‘이런’ 글자 위로 여러 번 덧대어 쓴 흔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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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 회식 뒤풀이에 참여하기로 한 건 가벼운 일탈에서 시작된 결심이었다. 시험 하나, 과외 하나, 내 몫 하나, 세상에서 빠진다고 하더라도 크게 문제 될 것 없지 않나, 하는 마음이 한겨울 외투 사이로 스며드는 찬 기운처럼 나를 조용히 휘감았다.

  “C는 이상형이 뭐야?”

  술자리 분위기를 주도하던 K는 구석에 멋쩍게 앉아 있던 내게 질문을 내어왔다. 그 말에 식탁을 둘러앉아 있던 16개의 눈이 순식간에 나를 향했다. 질문 하나에 도둑질을 들킨 사람처럼 심장이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붉어진 얼굴 위로 눈동자가 좌우로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 나는···. 어···.”

  가벼운 질문에 비해 대답은 더디고 복잡했다. 결국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헐레벌떡 자리를 빠져나왔다. 이런 고민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그만큼 재미없고 온기 없는 삶을 산다는 걸 들킬까 봐 잔뜩 쭈그린 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두 손 가득 맥주잔을 들고 3번 테이블로 가는 길에, 과외 학생 Y가 문제를 푸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 길에, K의 질문은 불쑥 튀어나와 나를 휘감았다. 이상형. 좋아하는 사람. 수업 외의 것. 내 삶과 동 떨어진 것. 기어코 외면하던 것. 어쩌면 나를 가둔 건 나였을지도, 이쯤이야 별거 아닌 일일 수도 있겠다는 결론에 다다른 건 정확히 일주일 뒤였다.

  초록색 보온 도시락 뚜껑을 열다 말고 빈 메시지창을 띄웠다. 그것도 일주일 뒤에, 질문을 질문으로 답한다는 사실이 어색하긴 했지만 용기 내어 물음표를 찍어냈다.

  ‘내일 시간 되면 점심 같이 먹을래?’

  답이 있거나 말거나 하나도 중요하지는 않으나 내 인생을 휘두를지도 모를 질문이었다. 푸른 심장이 제멋대로 꿈틀거리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