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연정의 졸업식이었다. 졸업식 2시간 전, 연정은 당근마켓에서 거래한 만 원짜리 고데기에 전원을 연결하고 있었다. 어젯밤까지도 유튜브에 ‘웨이브 고데기’, ‘고데기 예쁘게 하는 방법’, ‘똥손 고데기’ 따위의 검색어를 입력해 가며 제법 비슷한 모양을 만들어 냈는데 그날따라 왼쪽 뒷머리가 제멋대로 방향을 틀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감아 버리고 다시 시작하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더 지체되는 순간 웨이브고 뭐고 졸업식에 늦게 생겼다. 지각은 싫었다.

에잇.

   뜨거운 열이 미처 식지 않은 고데기의 코드를 뽑아버리고 화장대 앞으로 향했다. 15분. 연정에게 주어진 시간은 15분 남짓이었다. 딱 5분만 더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이만큼도 충분하다며 스스로에 최면을 걸었다. 그러면 무의식에 의해 손이 빠르게 움직인다고 믿는 연정이다.-

   졸업식장은 순식간에 한산해졌고 반가운 얼굴들과 정신없이 사진을 찍다 보니 진이 다 빠져있었다. 선물로 받은 초콜렛 하나를 한 입에 넣고 우걱우걱 씹었다. 헤이즐넛과 아몬드가 함께 씹히며 단 기운이 솟았다. 학사모를 벗어 손에 들고, 졸업장과 꽃다발, 선물들을 쇼핑백에 차곡 차곡 담았다. 5개월 같았던 5년이 이렇게 막을 내리는 것이 허무했다. 소중한 기억들이 짧은 영상처럼 연정의 머릿속을 막 뒤덮고 있을 때였다.

   연정 앞으로 커다란 꽃다발이 건네졌다. 두터운 손이 어색하게 꽃다발을 쥐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손의 주인을 보자마자 연정은 얼어버렸다. 지금 앞에 서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연정에겐 거대한 구멍이 있었다. 그러니까, 거대한 구멍이 만들어진 거다.

   연정은 그 구멍을 끊임없는 생각과 혼잣말, 끄적거림들로 채워냈다. 그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그 사람은 왜 나를 떠났을까. 그 사람은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을까. 내 생각은 하고 있을까. 나는 왜 이렇게 아파야 할까. 나는 어쩌다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 나는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그렇게 마구잡이로 생각의 꼬리를 밟다 보면 머릿속을 부유하는 문장의 주어는 어느샌가 연정 자신을 향해 있었다.

나는, 나는, 나는.

   비극적이게도 그 단어는 너무나 일상적인 단어였다. 자꾸만 시비를 거는 최민호랑 말싸움을 할 때, 식당 아주머니가 반찬을 놓으며 말을 건넬 때, 영어 작문 시험을 볼 때, 동기들과 술잔을 연거푸 비울 때 등등. 예고 없이 불쑥 등장하는 그 단어에 연정은 놀라지 않는 연습을 해야 했다. 언제, 어디서 그 단어가 등장해도 태연한 척, 그들이 겪는 그 일이 나에게도 일상적인 척, 나를 휘감았던 질문들은 존재하지 않는 척.

   연정은 꽃을 받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졸업식장에서 가장 크고 가장 화려한 꽃다발 따위를 손에 쥐고 싶던 게 아니었다. 최민호가 시비를 걸었을 때 큰소리로 이를 사람이 필요했고, 식당 아주머니한테 ‘나는 누구를 닮았다’라고 표명할 대상이 필요했고, 사랑하는 사람을 소개하는 작문 시간에 남들 다 쓰는 그 단어를 쓰고 싶었고, 집에 일찍 좀 들어오라 보채는 전화를 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엉뚱한 곳에서 답을 찾으려 수백 번, 수천 번 되뇌었던 질문들은 그 사람 앞에서 발설되지 못했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꺼내서 뒤적거리던, 그래서 잔뜩 낡아버린 그 말들은 정작 필요할 땐 꺼내지지 않았다. 내 머릿속을 휘젓는 것도, 개중 하나를 힘을 주어 잡는 것도 이뤄지지 않았다. 그 답을 찾으면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책상 위에 놓인 꽃다발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주황과 빨강, 하양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꽃다발은 얄궂게도 너무 예뻤다. 잠시 꽃다발의 출처를 잊은 채 와, 하는 소리 없는 탄성을 내뱉는가 싶더니 갑자기 꺽꺽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연정은 두려웠다. 영원히 이렇게 예쁠까봐, 아름다움에 넋이 나가 있다가 어느 순간 숨이 멎어버릴까봐. 그러다가 까맣게 다 잊어버리고 잃어버릴까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