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자는 내내 꿈을 서너 개 꿨다. 진아가 나를 보자마자 끌어안으며 환대하는, 그러다 언제 그랬냐는 듯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치는 꿈. 그 다음은 등 뒤에 차디찬 날개가 돋아나는 꿈. 그 꿈에서 나는 모두가 잠든 새벽, 학교 도서관에 몰래 숨어 들어가 높은 책장 틈을 날아다니며 케케묵은 책 냄새를 음미했다. 한 번 날갯짓을 할 때마다 푸드덕 소리가 텅 빈 도서관에 울려 퍼졌다. 꿈이었지만 먼지 쌓인 책 내음에 마음 한쪽이 뻐근해지는 느낌이었다. 마음이란 건, 특히나 스스로에게 솔직해야만 느껴지는 마음이란 건 도리어 꿈에서 더 생생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꿈은, 더는 내 곁에 남아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완전히 둘러 쌓여 엉엉 우는 장면으로 끝이 났다.

 느지막한 오후에 눈을 뜨자마자 진아에게서 와 있는 연락을 확인했다.

 오늘 보는 거지?

 짤막한 진아의 질문에 비슷한 농도의 답을 하고 싶었는데, 실패했다.

 7시 반까지 역 앞으로 갈 테니까 식당은 네가 좋아했던 파스타집을 가자. 다 먹고 나면 근처에 있는 카페에 휘낭시에를 먹으러 갈까. 아니면 술 한잔을 해도 되고. 분위기 좋은 선술집을 알아.

 답을 연달아 보내고 나니 내가 한심해졌다. 왜 나는 늘, 나를 미워하는 사람 앞에서 미움받을 틈을 주기 싫어 안달인 걸까. 잠을 못 자서 그런지 나갈 준비를 하는 동안 어지럼증을 느꼈다. 요즘은 이런 일이 잘 없었는데, 낯선 불면의 감각에 몸이 적응하려 애를 쓰고 있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는 내게도 청춘 같은 불면의 밤들이 있었다.   자기 전에 소주 몇 잔을 한 번에 들이키고 침대에 눕던 때. 그건 환상 속에 사는 나를 현실로 질질 끌고 와 침대에 드러눕히려는 행위이자 의식이었다. 현실은 별 거 없어. 그냥 술에 조금 취해서 편히 잠들면 그만이야. 그렇게 십수 번을 되뇌어야만 옅게나마 잠에 들곤 했다. 그때의 나에겐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이 수두룩했고 나는 그 날들을 대체로 살아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말도 안되는 꿈을 하루에 몇 개씩 꾸던 때에 나를 괴롭히던 생각들은 대부분 환상에 불과했다. 사랑보다 완벽한 우정이 있다는 것. 사람을 조금은 더 좋아하면 인생이 그만큼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것. 또, 나는 언젠가 매일 글을 쓰는 사람이 될 거란 것. 내가 행복하면 주변도 행복할 거란 것. 그런 생각들엔 낙관과 비관이 가득했다. 그러다 보니 가끔 정신을 잃고 발을 헛디딜 만큼 어지럽기도 했다. 지금의 나는 매일 현실 속에 산다. 어지러울 일 없이, 환상에서 멀어졌다. 그때는 온통 막막했던 미상의 날들을 이제는 다 알아버려 시시한 듯이 그저 그렇게 살고 있다.

 진아를 좋아했다. 진아가 나를 좋아해주길 바라서, 근데 나를 좋아해주지 않을 것 같아서 그냥 내가 좋아해버렸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의 끝에 얼룩진 묘한 불쾌감을 인지할 때면 나는 두 가지 전략을 취하는 편이었다. 그 사람을 내가 먼저 미워하거나, 차라리 사랑해버릴 태세를 갖추고 나서 조만간 완전하게 상처받기.

 사람들은 자기와 비슷한 불행을 안고 있을 때, 그 잠시 동안만 서로를 사랑한다. 마냥 불행하거나 마냥 행복한 사람을 온전히 아낀다는 건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 사람들은 대부분의 관계에서 쉬운 쪽을 택한다. 나는 마냥 불행하고 싶지 않아서 마냥 행복한 척 하는 편이었다. 진아는 그런 나를 사랑했다가, 미워했다가 했고 나는 그걸 줄곧 고스란히 느꼈다.

 진아는 글을 제대로 써보고 싶다는 내가 멋있다며 눈을 반짝였고, 그러다 내가 취업을 하게 되었다는 소식에는 시큰둥한 반응으로 나를 무안하게 했다. 내가 슬프다며 울 때 진아는 같이 눈시울이 붉어졌고, 내가 행복하다고 할 땐 그래 너는 그래도 살 만한 인생이지 라는 듯이 건성으로 고갤 끄덕였다. 우리는 어느 한 쪽이 완전히 상처 주거나 어느 한 쪽이 완벽히 버림 받지 못한 채 관계를 오래도록 끌었다. 그 관계가 서서히 힘을 잃어가는 동안 누구도 힘을 쓰지 않고 내버려 둔 거였다.

 이번에 진아와 끊겼던 연락이 재개된 건 5년 만이었다. 잃어버린 마음을 끄집어내는 일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치기를 부리는 듯한 일이었다. 보자고, 보고 싶다고. 어린 내가 어린 너를 좋아했던 것 같다고. 그래서 너를 미워했는데, 너무 미워서 밤잠을 설치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잠에 잘 든다고. 사람들이 싫고 세상이 무서울 때도 요즘은 곧잘 숙면에 취한다고. 그런 어린 말들을 요즘 뭐하고 지내느냐고, 밥이나 한 번 먹자는 지루한 문장으로 대신했다. 진아는 별다른 말 없이 그러자고 했는데, 어쩌면 나처럼 진아도 내뱉지 않고 삼켜냈을 유치한 말들이 사뭇 궁금했다. 

 진아를 만나러 가는 길에, 몇 년만에 나누게 될 대화를 제멋대로 상상했다.

 음, 나는 요새 기복이 줄었어. 잘 사는 것보다 잘 늙어가는 것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고 울고 웃는 것에 이제 그렇게 크게 동요 안 해.

 그래? 너답지 않네. 밥은 여전히 맨날 남겨?

 아니, 밥은 이전보다 많이 먹어. 이젠 너무 많이 먹어서 탈이야. 그런데도 이상한 게 힘은 더 없단 말이지. 불안에 모든 것을 쏟던 내 에너지는 온데간데 없어졌어. 그리고 어떤 건 쉬워졌고 어떤 건 더 어려워졌어.

 이를테면?

 음, 이를테면 사랑이 오히려 단순해졌고, 솔직하고 복잡한 마음 같은 건 더 어려워졌지. 

 내 말에 적당한 맞장구를 치며 잠자코 듣고 있을 진아의 시선을 또 제멋로 떠올렸다. 오늘 진아의 눈에서 읽어내고 싶지 않은 것들을 읽게 되더라도 실망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몇 년 전 잠에 들지 못해 뒤척였던 때처럼 수십 번을 되뇌었다. 오늘은 아프지 않을 거야. 밤이 되어서 집에 돌아가면 잠에 들 수 있을 거야. 어제처럼 이상한 꿈을 꾸지 않을 거야. 나는 문득 등에 날개 같은 것이 돋아나진 않았는지 뒤로 손을 뻗어 확인했다. 허전한 등을 한참 동안 어루만지다가, 내가 좋아했던 진아의 얼굴을 떠올렸다가, 다시 되뇌었다. 오늘은 꿈에서 날아다니는 일은 없겠지. 오늘은 잠에 들면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