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월호《환상》: 아이스 핫초코가 되고 싶어

109편째 풋소설

2025. 12. 19.

109회 (2025.12.20)

12월호 주제 《환상》

아이스 핫초코가 되고 싶어

예림

아이스크림. 진짜 무섭지 않아?

환이 바닐라 맛 아이스크림을 퍼먹다 말고 물었다. 환은 아이스크림을 단단하게 얼려 숟가락이 아닌 포크로 먹는 걸 즐겼다. 다른 건 몰라도 먹는 데 만큼은 저만의 철학을 담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이스크림이? 왜?

이렇게 차가울 땐 달콤하고 단단한 아이스크림이다가도, 녹아버리면 그냥 달콤한 맛이 나는 물이 되어버리잖아.

환의 손에 들린 포크 끝으로 녹은 아이스크림 한 방울이 맺혀 있었다. 상은 왼편에 있던 휴지 한 장을 뽑아 건넸다.

그게 왜 무서운 건데? 아이스크림 녹으면 당연히 물 되는 건데.

무서워. 온도가 변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본질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거. 더 이상 아이스크림이라고 부를 수 없잖아. 달라진 건 그저 온도뿐인데도.

상의 머릿속에 아이스크림, 본질, 온도 같은 단어가 빠르게 돌아다니는 사이 환이 말을 이었다.

그날. 우리 처음 만난 날. 헤어질 때 네가 핫팩 손에 쥐여줬잖아.

기억나. 갑자기 추워졌던 날이었잖아.

그 핫팩을 건네받은 탓인지 그 이후로 나한테서, 아니 내 어디께에서 계속 네 향수 냄새가 났다.

그래?

응. 근데 그것도 그건데 사실 나 그 핫팩 버렸어.

잘했네. 일회용 핫팩이었잖아. 따뜻하게 잘 썼어?

응. 한 10분 썼나. 지하철역까지 가는 길에 손에 쥐고 있으니까 따뜻해서 좋더라. 근데 지하철역 쓰레기통에 버렸어. 아직 따뜻했었는데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는 동안 생각해 보니 무서워지더라고.

갑자기 왜?

무서웠어. 네가 건넨 핫팩이 내 손에서 식을까 봐. 분명 네가 건넸을 때는 따뜻했는데, 이걸 건넨 네가 이 핫팩을 언제 뜯었는지, 몇 시간 동안 지속되는 핫팩인지 말을 안 해줘서 언제 식을지 모르겠는 거야. 내 손에서만큼은 뜨거운 채로 머물다 떠났으면 하는 마음에, 찬바람을 맞을 일이 더 남았는데도 낯선 향이 나는 뜨거운 핫팩을 얼른 버려 버렸어.

상은 환의 말에 흠칫 놀라 말없이 환의 눈을 쳐다봤다. 환이 머쓱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미안. 그리고 그렇게 허겁지겁 집에 도착해서 샤워를 하는데 갑자기 또 무서워지는 거야. 아니다, 이번에는 두려웠다고 말하는 게 맞겠다. 처음에는 따뜻한 물이 내 몸 위를 규칙적으로 흐르는 게 기분이 좋아서 그냥 오늘 날이 많이 추웠구나, 정말 겨울이 왔구나, 하곤 말았어.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뜨거움이 끔찍이도 좋아져 버린 거야. 그래서 뜨거운 물 밖으로 나가기가 두려웠어. 뜨거운 물을 느끼는 일이 영원히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나는 결국 물 밖으로 나와 찬 공기를 입어야 했지만.

...

나 너무 힘들었어. 뜨거운 물을 그만 멈추고 나오는 게. 물을 꺼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또 다른 두려움이 커졌어. 이렇게 있다가는 따뜻함에 온몸이 녹아버릴 텐데, 이렇게 영원히 있을 수 없는데. 이 온도에 적응해 버리면 안 되는데. 나는 그런 사람이 되면 안 되는데.

환의 말들은 마치 고백 같았다. 환이 어떤 생각을 하며 살고 있었는지, 환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환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고, 또 어떤 사람이 절대로 되고 싶지 않은지 옅게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온도에 민감한 사람이라는 걸 깨닫곤 나를 영원히 따뜻하게 데워주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 누군가를 옆에 둔다면 말이야. 온도를 유지해 주는 사람을 찾아야겠다고 다짐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히 널 만난 거야.

...

근데 있잖아. 내가 여태껏 본 너는 내가 그리 찾아 헤맨 사람의 유형은 아니야. 따뜻하기는커녕 가끔은 날 너무 차갑게, 이 아이스크림보다도 더 차갑게 만들었어.

계속 눈물을 참는 듯 목소리가 떨리던 환은 이 대목에서 결국 눈물을 보였다. 환의 흰 볼을 따라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굴렀다. 상은 휴지가 옆에 있다는 걸 알았지만 움직이지 못했다. 눈물은 아이스크림 통을 비껴 무릎 위에 놓인 쿠션으로 툭 툭 떨어졌다. 환의 절친한 친구가 작년 생일선물로 사준 쿠션이었다.

아이스크림 통 겉으로는 하얗게 얇은 서리가 서려 있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많이 녹았을 터였다. 아이스크림을 바라보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환도 아이스크림을 흘깃 내려다 보더니 울음이 커졌다. 그 바람에 환의 발음이 뭉개졌고, 상은 조금 더 집중해서 들어야 했다.

근데 그것보다 중요한 건 너는… 그래도 괜찮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야. 늘 따뜻하거나 뜨거울 필요는 없다고, 식어도, 차가워져도 괜찮다고 온몸으로 말해준 사람이야.

...

이제 나는 뜨거운 물 샤워를 금방 끝내거나, 아이스크림이 녹아도 그저 녹은 물이라고 생각하고 말아버리거나, 주머니 속에서 차갑게 식어있는 핫팩을 무심코 발견하겠지. 네가 조금씩 방법을 알려준 일이었으니까.

말이 끝나자마자 상은 환의 곁으로 가, 환과 냉기를 나누고 있던 아이스크림 통을 탁자 위로 치우고 환을 안아주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어떤 말보다도 몸으로 온기를 전해주는 일이 꼭 필요할 것 같았다.

난 따뜻한 아이스크림도 아이스크림이라고 부를래.

상의 왼쪽 볼에 닿아 있던 차가운 환의 입에서 더운 숨이 느껴졌다.

작가의 말
따뜻하거나 차갑거나

그저 자연스러운 연말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