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월호《꽃다발》: 종말

12편째 풋소설

2024. 3. 22.

🍏 3월호《꽃다발》: 종말

12회 (2024.03.23)

3월호 주제 《꽃다발》

종말

진희

“Htrae 108호.”

차웬은 안대를 낀 상태로 중얼거렸다. 조종간에 앉아있던 밀러는 차웬의 혼잣말이 익숙한 듯 듣기만 하고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여전히 지구는 레이더망에 잡히지 않았다.

“우리 우주선 이름은 왜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차웬은 널브러져 있던 몸을 바르게 하고 안대를 벗었다. 그러곤 밀러 옆에 있는 조종간에 앉아 현재 좌표와 떠나온 별의 좌표, 두 위치 간의 청색편이, 가장 가까운 별과의 거리(parsec), 현재 중력장의 세기 등을 계산했다.

“이제 집 돌아가기는 글렀다. 너무 멀어졌어.”

밀러는 목 스트레칭을 하면서 말했다.

“집 돌아갈 생각을 하고 이 우주선에 탔어요? 애초에 이 계획을 추진한 건 당신이었으면서. 지구를 보고 싶다면서요.”

“그냥. 갑자기 실감이 난 것뿐이야. 후회는 없어. 너도 그렇잖아. 우리의 뿌리인 별은 보고 죽어야지.”

차웬의 말이 웃긴 나머지 밀러는 깔깔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죠. 거의 불로불사지만. 아, 죽음이라는 단어를 진짜 오랜만에 듣네. 노화를 선택한 사람은 거의 1억 분에 1명꼴 아니에요? 당신도 노화 방지 개조 받았을 텐데.”

“그건 어릴 때 이미 받았지. 그래야 이 긴 우주의 시간을 버틸 수 있잖아. 나는 지구를 보기 위해 태어났어.”

차웬은 떠나온 별을 생각했다. NOTIE-96. 지구가 더이상 살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인류가 지구를 떠나 정착한 별.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 별을 찾은 건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적어도 차웬이 역사 시간에 배운 내용에 따르면. 차웬은 ‘NOTIE-96’이 심심한 별이라고 생각했다. 인공 태양 밑의 그린 듯한 평화, 쉽게 변하지 않는 환경과 가슴 밑바닥부터 차오르는 답답함이 이 별은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차웬의 어긋난 삶의 목적지가 지구라는 걸 깨닫는 데에 약 20년이 걸렸다. ‘NOTIE-96’의 역사를 배울 때 스크린에 잠시 지나간 푸르고 푸른, 생명이 요동치는 별인 지구가 내가 있을 곳이라는 걸 차웬은 직감했다. 우리의 머나먼 조상이 살았던 별, 이 꾸며낸 별의 근간이자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느껴지는 별, 지구. 차웬은 온갖 자료와 역사를 뒤지며 지구를 공부했고 100살이 되자마자 자신의 연구실 동료인 밀러와 함께 지구를 찾으러 떠났다.

한 세대 전(거의 5000년 전)에는 지구를 찾으려는 노력이 아예 없진 않았으나, 차웬의 세대에 와서는 그 누구도 버린 별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떠나온 별에 사람들은 미련을 떨친 지 오래였다. 차웬을 빼고. 차웬은 여전히 인류의 근간인 별이 그리워 미칠 것 같았다. 이 아름답던 별이 자신을 부르는 이유를 직접 확인하고자 지구로 떠나기로 했다. 차웬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리석은 여정에 연구실 동료인 밀러는 재밌다는 이유 하나로 순순히 함께 떠났다.

여정의 가장 큰 문제는 우주의 팽창. 우주는 끊임없이 팽창한다. 팽창의 과정에서 어떤 별은 멀어지고 어떤 별은 가까워진다. 지구는 ‘NOTIE-96’과 한없이 멀어진 지 오래였다. 우주의 팽창과 지구의 과거 청색편이 기록, 같은 은하계 안에서의 속도 계산 등을 통해 지구와의 거리를 유추하자 정의할 수 없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그렇지만 둘은 떠났다. 지구를 보지 못하고 죽더라도 할 수 있는 만큼의 노력을 하고 죽고 싶었다. 인류가 머물던 별에서 진짜 삶을 보내고 싶었다.

차웬은 생각에 빠지면 손가락으로 책상을 치는 버릇이 있었다. 몸을 의자에 젖힌 채 아무 소리 없이 손가락만 툭툭, 툭툭툭 거리는 습관이. 밀러는 차웬의 뒤로 다가와 차웬의 손을 잡고 레이더 스크린으로 가져갔다. 생각에 빠진 차웬은 남의 말을 못 듣는 경향이 있어서 툭툭거림을 멈추게 해야 생각에서 빠져나오게 할 수 있었다. 밀러는 차웬을 다루는 법을 잘 알았고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자신의 말에 집중시켰다.

“옆에 함수 계산한 거랑 레이더 스크린에 집중해봐요. 연료를 많이 쓰긴 하지만, 일부로 블랙홀 근처로 가서 블랙홀 중력의 추진력으로 나아가는 방식을 많이 썼잖아요? 그 덕분에 시간을 엄청나게 줄였고. 뭐, 수억 년은 지났지만요. 내가 방금 확인하니까 5번째 블랙홀의 중력장 식에 오류가 났더라고요. 이 부분 좀 수정해주세요.”

“아, 거기에 오류 났었어? 계산만 계속 돌렸었는데 식에 미스가 있었네. 잠시만.”

잠시 고민하더니 식을 고치고 계산을 돌린 차웬은 밀러가 본 적도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당신 그런 표정 처음 봐요. 우리 또 몇천 년 돌아다녀야 해요?”

“아니.”

“그러면요?”

“곧이야. 여기. 스크린에 보이는 여기가 지구야. 우리 조금 있으면 지구가 보이는 곳으로 돌입해.”

밀러는 곧 우주가 무너진다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어이없어했다. 멍해진 차웬의 얼굴을 무시하고 스크린을 보자 밀러 역시 그 누구보다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차웬은 입을 꾹 다문 후에 당황한 밀러의 손을 잡고 우주선 앞쪽의 작은 유리창으로 갔다. 아주 자그마해서 한쪽 눈으로만 보아야 둘이 함께 볼 수 있는 작은 유리창이었지만, 둘에게는 충분했다. 차웬은 말했다.

“5분 뒤야. 고작 5분 뒤.”

밀러는 말이 없었고 둘은 침묵으로 가득한 공기 속에서 숨을 쉬었다. 어디선가 푸른 빛이 보였다. ‘NOTIE-96’에서는 본 적 없는 맑은 푸른 빛이 저 멀리서 반짝거렸다. 다리가 저린 줄도 모른 채 작은 빛 하나마저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로 지구의 모습이 완전히 보일 때까지 무언가에 홀린 사람들처럼 서 있었다. 미동조차 없는 차웬과 달리 밀러는 푸른 빛이 보이자 지구를 마주한 차웬의 표정이 궁금해졌다. 밀러는 차웬의 눈을 바라보았고 차웬의 눈은 점차 푸른색으로 가득 찼다. 오염돼서 더러워진, 생명력이라곤 없던 지구가 아니었다. 지구는 인류가 없던 수많은 시간 사이 회복되었고 교과서에서 보았던 옛날의 아름다운 지구로 돌아가 있었다. 차웬과 밀러는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눈물이 떨어졌다. 진짜 지구. 진짜 삶. 내가 있을 곳. 둘은 생각했다. 아,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꽃다발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