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아오는 해를 등지고 걸었다. 나는 이렇게 쉽게 흩어지는데, 너에 대한 기억만은 견고하다는 게 우스워. 부스러기가 구슬을 품을 수도 있나? 아, 꿈도 잠도 나도 삶도 전부 지독한 농담 같다.

  나는 내가 아닌 것들 사이에서만 내가 된다. 서글프게도, 나라는 존재의 상은 긍정의 서술보단 ‘무엇이 아닌-’, ‘무엇과는 다른’-, ‘무엇을 싫어하는-’ 따위의 표현 아래에만 맺혀왔으니까. 남들보다 오래 걸린 대학 졸업 직후, 훌쩍 긴 여행을 떠나버린 것도 내심 이러한 성정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학생이라는 최초의 정체성이 힘을 다해가던 그때, 나는 한참을 날아 낯선 땅 위에 섰을 때에야 비로소 ‘아, 나라는 것이 아직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숨통이 트였다. 굳이 베를린이었던 건, 우선 다른 대도시들에 비해 물가가 저렴해서였고, 언제 어디선가 “거긴 인생의 막다른 곳에 다다른 사람들이 흘러드는 최후의 도시야”라는 농담을 들어서이기도 했다. 갖은 인생들이 어쩌다 수렴하는 땅, 그곳에서 낯선 언어와 눈빛과 살갗들 틈에 머물고 싶었다.

  그렇게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로 악착같이 모은 돈 이백만 원과 희미해진 나를 데리고 긴 여행길에 올랐다. 도시 외곽 호스텔에 짐을 푼 나는 한동안 비행기 값이 무색하게 숙소 주변만 맴돌았다. 매일 점심 즈음 일어나 호스텔에서 제공하는 호밀 빵을 먹고 주변 공원을 걷다가 가까운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 날씨가 좋으면 주택가를 돌아다니고 작은 서점을 구경하는 것. 해가 저물면 맥주와 함께 감자튀김이나 케밥을 사 먹는 것.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단순한 일정에도 나는 쉽게 기진맥진해져서, 숙소에 돌아오면 주로 침대에 누워 한국 드라마를 봤다. 그렇게 지낸 지 일주일, 운 좋게 홀로 지내던 4인용 도미토리에 미국인 여자 셋이 들어왔다. 나보다 다섯 살쯤 어리다던 그들은 나에게 베를린이 세계 최고의 클럽 도시라는 사실을 알려주었고, 우리 방을 파티와 술, 숙취와 수다의 여파로 가득 채웠다. 처음엔 그 친구들의 테마별 화장이나 옷차림, 그날그날 만난 남자들에 대한 얘기를 듣는 재미가 쏠쏠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호스텔에서의 고요한 오후가 그리워졌다.

  시내로 나가 관광지를 둘러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아직 그 친구들이 잠들어 있던 이른 오후였다. 그들은 ‘베를린’에서 매일 밤 K-드라마나 시청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했고 언제부턴가는 오기가 생겼는지 번번이 나를 데리고 나가려 했다. 나는 반복되는 거절에 나중엔 죄책감까지 느꼈는데, 그날도 퍽퍽한 빵을 씹으며 핑계를 지어내다가 차라리 도망치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다다랐다. 그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여행다운 여행을 시작했다. 오랜만에 머리를 풀어 내린 나는 숙소 앞 벤치에 걸터앉아 구글에 “베를린 관광지”를 검색했다. 브란덴부르크문,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물, 미술관, 박물관, 또 박물관 … 관광 명소들의 역사성에서 오는 방대한 정보와 무거운 교훈이 숙제처럼 가슴을 눌렀다. 현실에서 도피해 온 관광객에게 너무 가혹한 거 아닌가, 범람하는 인류의 유산에 질려버린 나는 그냥 나무가 많은 강가에 앉아 맥주나 마시기로 마음을 굳혔다. 지도를 보니 마침 기념사진을 남기기 좋아 보이는 베를리너 돔이 슈프레강을 끼고 있었고, 나는 그곳을 목적지로 정했다. 그렇게 트램을 타고 베를린을 가로질러 도착한 낯선 도심에서 첫사랑과 재회하리라곤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베를리너 돔 앞에서 사진을 찍고 얼마쯤 더 걸으니 훔볼트 대학 건물이 보였다. 그 앞엔 건물 울타리를 따라 헌 책과 골동품을 파는 소규모의 플리마켓이 서있었다. 누군가의 손때가 탄 책과 물건들을 수집하는 데 취미가 있는 나는 매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읽을 수 있는 책은 한 권도 없었지만, 헤진 책등들 사이 간간이 익숙한 작가의 이름을 마주칠 때마다 이번 여행의 의미를 찾아가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표지가 예쁜 시집 한 권을 구매하고 주인아저씨에게 인사를 건네려던 찰나, 갑자기 심한 바람이 불어왔다. 뺨을 스치는 바람에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떴을 때, 내 시야엔 팔랑거리는 빛바랜 종이와 접힌 귀퉁이, 박스에 쌓인 오래된 필름들과 인화된 사진들, 그리고 그것들을 뒤적이는 손 하나가 있었다.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자, 너무도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어? 야, 너 뭐야?”

  극적인 순간이었다. 그런데 정말 그 대사가 최선이었을까? 한 번만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근사한 어른인 척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안부 인사를 건넬 텐데. 아무튼, 우리는 반가움과 어색함에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자연스레 인근의 공원으로 향했다. 자그마치 15년 만이었다. 슈프레강 위로 해가 지고 있었고, 우리는 온 몸에 노을을 걸친 채 병맥주를 홀짝이며 밀린 이야기를 풀어 갔다. 그는 한국에서 공대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석사 유학을 하고 있다고 했다. 사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내 머릿속은 말할 수 있는 일들과 말할 수 없는 일들을 솎아내느라 바빴고, 결국 나는 지난 세월을 대강 얼버무려 얘기해야 했다. 모호한 설명 끝에 멋쩍어진 나는 뜬금없이 그에게 조금 전 구매한 헤세의 시집을 읽어 달라고 했다.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책을 받아 들더니 곧 무딘 언어로 시 몇 편을 번역해 주었다. 더듬더듬 퍼즐처럼 맞춰지는 그의 문장을 들으며, 나는 강의 황금빛 수면을 노려보다가, 순간 반사된 빛에 눈이 부셔 그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득, 잊고 있던 기억들이 내게 물밀듯 쏟아져 들어왔다.

  어린 그와 내가 사는 오래된 장면들. 옛 주공 아파트의 빨간 지붕과 너른 화단, 상가 건물의 깨진 바닥 타일과 녹슨 계단 손잡이, 오래된 문방구와 비디오 가게, 미용실의 파마약 냄새.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고 가뿐히 지나가고, 교복을 입은 우린 양팔을 벌려도 다 안지 못할 만큼 우람한 나무들 사이로 걸어간다. 메타세콰이어 낙엽 위로, 내려앉은 벚꽃잎 위로, 쌓인 눈 위로, 고인 장맛비 위로. 아, 엇갈린 기호들. 그날의 나는 무얼 그리 열심히 감추려 했을까? 그를 좋아해서 했던 일들이 서투른 해석에 어떻게 읽혔을지, 이제야 조금 짐작이 간다. 버벅거리고, 놀리고, 도망치고, 속이면서 네 주위를 뱅뱅 맴돌기만 했지. 널 만나고 집에 돌아오면 머리가 핑 돌 정도로 어지러운 날들이었어. 나는 지는 해를 반사해 옅게 빛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그 시절의 단순함과 복잡함을 한참 동안 곱씹었다.

  4월의 베를린은 일교차가 크고 맑은 날과 흐린 날이 섞여 있어 주에 몇 번은 꼭 가벼운 비가 왔다. 그날 저녁에도 어김없이 부슬비가 내렸다. 벌써 독일 날씨에 적응한 그는 방수가 되는 바람막이 재질의 겉옷을 입고 있었고, 나는 가죽 신발을 신고 얇은 셔츠와 카디건을 입고 있었다. 우리는 비를 피해 가까운 베트남 음식점에 가 쌀국수를 사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문득 숙소가 너무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의 소란스러움과 공용 샤워실의 불편함, 낡은 매트리스 속 날 선 스프링이 떠올랐다. 갑자기 길목은 으슥하게, 날은 춥게, 낯선 도시와 언어는 두렵게 느껴졌다. 어둠을 입은 아스팔트와 건물, 골목 곳곳의 거친 그라피티들, 그 풍경 틈에서 그의 미소만이 익숙했다. 그때, 거리의 나무들이 그를 통해 내게 말을 걸었고 바람까지 나서 걸음을 부추겼으므로, 우리는 그의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오후와 저녁, 밤과 더 깊은 밤 내내 아득한 곳으로 밀려가던 마음이 제 자리를 찾은 건 다음 날 새벽이었다. 끝내 잠들지 못한 나는 창을 열어놓고 동트는 하늘을 바라봤다. 손 밑에 느껴지는 낯선 이불의 감촉에 눈 밑이 파리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일몰과 일출은 겉보기엔 참 비슷하구나. 몽롱한 도시의 풍경 위에서, 나는 생각했다.

  깊이 잠들어 아주 긴 꿈을 꾸고 싶다. 그 세계에선 어떤 일이든 가능했으면 좋겠다. 책임 없이 떠나고 싶다. 시간도 흐르지 않고, 아무 마음도, 행동도, 원인도, 결과도, 인연도, 우연도 없는 곳으로. 그곳이 낙원이 아니라도 좋아. 아, 누군가 나를 데려가 주면 안 되나? 아니, 아니야. 사실 나는 이런 마음이야.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 어딘가 잘못된 것 같다는 마음, 어그러진 삶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 이런 감정은 익숙하기도 하지. 언젠가 산책을 하다가, 책을 읽다가, 여행지의 바다에서, 늦잠을 자고 눈을 뜬 고요한 침대에서, 적막한 밤의 책상에서 느껴봤던 생경함. 내가 살아있다는 확신이 사그라지고 존재가 모호해지는 순간들.

  아, 지겹다.

  나는 방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찾으려던 건 네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조용히 옷가지를 챙겨 거리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