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진은 언제나 자신이 먼지와 같다고 생각했다. 받침에 들어가는 니은의 자리를 옆으로 조금 옮기면 이름이 비슷해지기 때문만은 아니었고, 그보다 더욱 본질적인 습성에서 겹치는 부분이 있었다. 먼지는 곳곳을 방랑했다. 길을 걷는 사람들의 동그란 정수리 위로, 이불가지를 털면 그 주위로 자그마한 호를 그리며, 매일 아침 열리는 창문 틈새를 넘나들며. 그러나 사람의 손길과 관심이 닿지 않는 곳에선 먼지들이 부유하기를 멈추고 그득히 쌓여갔다. 먼지는 방임을 먹고 자랐다.

  미진은 시간의 흐름을 굳이 셈하지 않았다. 하루를 사는 것과 일 년을 사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진은 올해 자신의 나이가 몇인지도 잘 몰랐다. 그저 하늘에서 내려온 햇빛이 자신의 몸에 닿을 때마다,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는 게 인생의 전부였다. 감은 눈꺼풀을 비집고 스며드는 노을빛에서는 익숙한 색채가 느껴지곤 했다. 그 빛을 떨쳐내려 애쓸수록 선명히 떠올랐다. 미진의 시간이 흘렀던 마지막 지점의 언젠가, 그 귤빛 먼지를 보았던 때가.

  그날 동생은 거실에 엎드려 있었다. 동생이 끅끅거리며 신음할 때 미진은 작은 방에 깃든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사시사철 그림자가 드리운 장롱 옆에 기대어서 몸을 떨었다. 바닥에서 찬기가 올라와 몸 전체를 관통하고 방안에 냉한 기운이 들어찼을 때, 둔탁한 폭발음 같은 것이 미진과 밀착한 바닥을 진동시켰다.

  미진은 양옆으로 떨리는 무릎을 주먹으로 마구 때렸다. 주먹 안의 손톱들이 초승달 모양을 찍어내며 손아귀의 살갗을 파냈다. 미진은 맞고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고, 그 안도감은 공포보다 더욱 감당하기 힘든 무게로 온몸을 내리쳤다. 거실의 장면이 미진의 머릿속에 생생히 그려졌다. 동생의 뒤통수를 내리치느라 벌게져 있을, 옷자락을 걷은 팔뚝과 살결이 거친 몸. 잔뜩 웅크린 채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을 동생은, 귀가 먹먹해지고 주변 감각이 아득해져갈 때쯤 한 가지 의문을 품을 거다. 나는 왜 또, 아버지를 화나게 만들었나. 언니는 보지 않고도 동생의 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미진은 바닥을 주시했다. 우리의 울음을 청취하는 세계란 없었다. 누구도 미진을 돕지 않았고 미진 또한 몸을 던져 동생의 고통을 덜어주기는커녕 바닥으로, 바닥으로 자진해서 넋을 빼앗기고 있었다. 장롱과 벽이 맞닿아 이루는 사각지대에는 먼지가 수북했다. 잿빛 속에서도 보일 정도로 뭉텅이 진 먼지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풍겼다. 실오라기들이 서로 뒤엉킨 모양새의 먼지를 미진은 잠시 동안 응시하다가, 발로 툭 건드려 보았다. 그러자 민들레 홀씨가 날리듯이 먼지 덩이가 저 멀리로 헤엄쳐 갔다. 먼지 덩이가 자리를 옮겨간 것이 먼저였는지, 목소리를 들은 게 먼저였는지는 모른다.

  “아파요, 죽을 것 같아요.”

  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로 아프냐는 질문에 동생은 허덕이며 그렇다고 했고, 아버지는 동생의 대답이 거짓말이라고 했다. 거짓말은 벌을 받아 마땅할 만큼 나쁜 거라고.

  미진은 귀를 막고 방 한가운데 놓인 먼지를 노려보았다. 미진은 거짓말에 능했다. 배고파도 배가 고프지 않다고, 아파도 아프지 않다고 하는 거짓말에. 미진은 잘못하지 않았으니 잘못한 게 없다고, 죽겠으니 죽을 것 같다고 외치는 동생의 솔직함이 원망스러웠다. 동생은 몰랐다. 우리의 정직함은 결코 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겹겹이 쌓인 먼지 덩이에는 중간 중간 틈이 많았다. 금방이라도 흩어져 공기 중으로 곧 분산해버리고 마는 허술한 상태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림자가 만들어낸 모호한 경계선 안으로 자취를 감추어 한층 까매진 미진과 달리, 미진의 가벼운 발길질 이후 창문 앞으로 거처를 옮긴 먼지에는 조금 밝은 기운이 감돌았다. 창문 바깥에서 넘어온 노을빛이 먼지 다발에 난 구멍들을 메우고 있기 때문이었다. 서쪽을 향해 있는 집으로 들어오는 노을빛은 붉다기보다 노르스름했다. 노란 끼가 도는 노을빛은 먼지 다발 사이에서 파도처럼 넘실거리기를 반복하다가, 그 미흡한 표피를 통째로 감싸 안기에 이르렀다.

  미진의 눈에 그런 먼지 덩이가 꼭 귤 같아 보였다. 미진은 잠시 생각했다. 지금 거실에 나가서, 먼지가 울퉁불퉁한 귤이 되었고 그건 참 예뻐요, 같은 말을 한다면 어떨까. 물론 그 먼지는 버젓한 귤의 생김새보다는 썩어서 곰팡이가 핀 귤을 닮았기 때문에 예쁘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런 거짓은 죽을 것 같다고 외치는 진실보다도 얻을 게 더 없어 보였다. 미진은 대신에 먼지에 스며든 노란 빛을 보며 바깥 하늘의 색깔을 상상할 수 있었다. 회색빛 그림자도, 아이의 메마른 울음도 물들일 만큼 하늘은 온통 귤빛일까. 그러나 광막한 하늘의 귤빛이 미진에게는 결코 닿지를 않았다.

  어리고 작은 동생의 숨이 점차 옅어져 가는 동안, 미진은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우리는 가닿을 수 없는 곳을 떠올리며. 햇살은 진한 귤빛, 거리의 표지판도 모두 쨍한 노란빛을 띠고, 미진의 중학교 건물은 밝은 오렌지 빛에, 운동장엔 희미한 귤빛의 아지랑이가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곳. 웅크려 앉은 미진은 그 속을 먼지처럼 부유하는 자신을 끝없이 상상했다.

  그날 귤빛 먼지와 함께 했던 미진은 죽지 않았다. 죽음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만, 죽지 않은 미진에겐 그동안 누구도 그렇게 묻지 않았다. 혹시, 혼자 살아남은 걸 후회하고 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