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월호《거짓말》: 미래에서 온 여자들

16편째 풋소설

2024. 4. 19.

16회 (2024.04.20)

4월호 주제 《거짓말》

미래에서 온 여자들

다원

B는 J를 거짓말쟁이라고 불렀다. J는 복잡한 장소는 싫다고 말했다. B는 J와 을지로 구석에 자리 잡은 전시를 가보고 싶었다. 여느 노동자들이 철을 깎고 녹이는 길목 사이엔 노동복을 패션으로 입은 젊은 애들이 지나다녔다. 여름에도 골목은 어두웠다. 사월의 벚꽃도 그 안으로는 들어오질 못한다. 장마철이 아닌데도 바닥은 물로 가득해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계단은 성인 여성의 발 사이즈 정도도 버거울 정도로 작고, 골목길은 아이유 노래마냥 열두 개로 갈려있고 지랄이었다. (J의 표현이 그랬다) B가 가고 싶은 전시장 안에서도 코를 찌르는 지하 하수구 냄새가 났다. 작가들은 자기 작업에 불쾌한 암모니아 냄새가 나도 어느 정도 견뎌야 했다. 그래도 오랜 노동자들의 전유물을 온몸에 치렁치렁 두른 스무살들이 잘만 방문했다. 걔네는 목덜미에 어울리지도 않는 스파이시 향수를 뿌렸다. 그 공간에 서 있자면 변소에 통후추를 뿌린 냄새가 났다. J가 싫어하는 것들은 전부 거기 있었다. 이번 전시는 B가 오랫동안 좋아한 작가의 개인전이었고, 그녀의 작업 세계가 B에게 주는 감동의 이유를 아는 것은 오직 J밖에 없었다. 그래도 J는 복잡한 장소는 싫다고 했고, B는 혼자 3호선 을지로3가역에 내렸다.

J는 X를 거짓말쟁이라고 불렀다. X는 긴 머리가 싫다고 했다. 짧은 머리가 잘 어울리는 자신이 좋다고 말했다. X에게 단발은 수치의 길이였다. 꽉 막힌 여자 중학교의 학생주임이 억지로 머리를 기르라 했을 때나 한 번 해보고 말았다. 남자 중고등학생들의 촌스러운 바가지 머리부터 투블럭, 삭발 후 탈색이나 차라리 대머리라도 좋다고 했다. X는 지속해서 삭발했다. 우리는 걔를 열린 이소라라고 불렀다. 모 토크 프로그램에 나와 개그우먼 안영미가 했던 말을 인용해 별명을 지었다. J는 X를 동경했다. 걔는 자신이 사는 세계에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X는 늘 J의 시선 밖에 서 있었다. www로 시작하는 인터넷망 따위에서 검색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만 같았다. J는 5년간 길렀던 머리를 잘랐다. 허리까지 오던 생머리를 자르겠다고 하니 주변에선 사람 대신 머리카락만 봤다. 종종 머리카락이 나라는 사람의 주체인 듯 했다. 목덜미를 바리깡으로 시원하게 밀어놓으니 참 못생겼더라. J는 무난한 모든 것이 제 피부처럼 잘 어울리는 자신의 체형과 얼굴이 미웠다. 자라지 않은 짧은 머리를 잡아당기며 목을 몇 번 쓸었다. X는 그래도 짧은 머리가 편하지 않냐고 했다. J는 한동안 모자를 눌러쓰고 다녔다.

X는 A를 거짓말쟁이라고 불렀다. A는 애인과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애인과 나눌 수 있는 대화가 극히 제한적이어서 마치 제가 매 순간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숨기는 것과 속이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지만, 그 사람을 기만하고 있다는 마음은 왜 똑같이 드는 거냐며 토로했다. A는 지금까지 만난 애인들에게 어떠한 기대도 품지 못했다. 만나면 좋은 것, 미래를 지켜보는 것. 자신이 가진 애인이라는 역할 수행은 그뿐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A의 헛도는 관계는 상대가 영원히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 은은한 무시와 외면을 만들었다. 애인에 대한 배타적 태도는 오히려 A를 불완전하게 했다. 데이트에 나간 날이면 자신이 반만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걔의 말이 제게 깊게 박히지 못하고 늘 허공으로 튀어 다녔다. 그럴 때마다 A는 X에게 진솔한 이야기가 담긴 맥주를 선물했다. 삶에 대한 회의적 감정과 여전히 지긋지긋한 외로움의 문제, 그리고 나를 이렇게 만든 아주 어릴 적의 트라우마가 캔 안에 담겨있었다. X는 여전히 애인을 만나는 (시기마다 인물은 달라졌다) A가 이해되지 않았다. A는 늘 애인에게 자기 신체 일부분을 나누어주고 왔다. A는 X와 함께 있을 때 자신이 온전하다고 느낀다고 말했지만, A는 항상 반쪽짜리 몸을 맥주로 채우기만 했다. X는 노란 맥주 거품으로 가득 찬 A의 모습이 참 지겨웠음에도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허무함에 A와 똑같이 변하곤 했다.

A는 B를 거짓말쟁이라고 불렀다. B는 유흥이 싫다고 했다. 자극적이고 중독적인 쾌락이 너의 일상을 파괴할 거라고 말했다. 네게 진정으로 위로가 되는 것을 찾으라고 훈수했다. A는 인스턴트 적인 만남도 주저하지 않았고, 낯선 이에게 벽을 세우지도 않았다. 가끔은 자기 파괴적으로 누군가를 찾기도 했다. B의 말에서 반박할 수 있는 거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커피를 혀로 할짝대며 마시는 척했다. B는 술도 잘 마시지 않았고, 담배는 끊었다고 했다. 평소 A는 한 시간에 한 번씩 담배를 태웠지만 B와 함께일 땐 세 시간에 한 번씩 눈치를 보며 자리를 일어났다. A는 거리를 배회하고 손을 씻고 자기 옷가지를 몇 번 펄럭이다 돌아오는 나름의 노력을 했지만, B는 그럼에도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둘의 거리를 넓혔다. A는 B의 마음에 들기 위해 B가 말한 책을 찾아 읽었다. B는 상심에 빠지면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작가를 찾았고, 영화를 보고, 공부를 했다. A의 문제를 정신의학적 용어로 설명했다. 섭섭한 마음이 들어 위로해달라고 하면 그게 자신의 위로 방식이라 말했다. A는 책을 읽다 잠들어 유튜브에 나와 있는 요약 설명을 보고 B의 앞에서 완독한 척을 했다. A는 그게 왜 B에게 좋은 위로를 주었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 안에는 A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자신과 B의 만남이 책 한 권의 집필 과정처럼 느껴졌다. 실재하는 나를 두고 B는 여전히 처음 듣는 철학가 이름을 뱉었다. A는 그들의 이야기가 너무 멍청하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B의 앞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나는 나를 거짓말쟁이라고 불렀다. 종잡을 수 없이 변하는 나 자신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매번의 실수나 선택은 내 신체 부품을 하나씩 갈아 끼웠다. 친구는 내게 테세우스의 배가 뭔지 아느냐 물었다. 과거의 내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는 나의 고민에 흥미로워하며 철학적 난제를 꺼낸 것이다. 그가 내게 공감하며 함께 슬픈 눈으로 맥주를 쳐다보길 원했지만, 그는 열심히 난제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테세우스가 타고 온 배를 영원히 보존하기 위해 썩은 판자를 하나씩 교체하다 보면 어느 순간 원래의 조각은 하나도 남지 않을 텐데, 우리는 그걸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수 있을까? 걔는 나를 순식간에 거대하고 위대한 선박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나를 위한 노동자들은 썩은 판자나 망가진 부품 말고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모조리 다른 것으로 바꾸고 말았다. 영원한 보존 따위는 원하지도 않았다. 대신 나는 빠진 부품들을 적어 모았다. 작은 일기장에 변해버린 것들을 적어주었다. 그들은 하나둘씩 이름이 생겼다. 민지나 은영처럼 완성된 사람 이름은 아니었다. 그저 알파벳을 순서대로 붙여주었을 뿐이었다. A부터 Z까지. 아주 간편한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