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차게 문을 열고 카페를 들어선 여자가 외쳤다. 소리는 하얀 셔츠를 입은 남자를 향하고 있었다. 

  “좋아해요 (｡>﹏<｡) ”

*** 

   남자는 천(1000)하고도 여섯 번째 손님을 사랑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 손님이 여자일지, 남자일지, 혹은 사람일지 아닐지 모르지만 남자는 그냥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었다. 여기서 남자가 정한 1006이라는 숫자는 그저 남자의 생일 뒤에서 네 자리를 따온 것뿐이었지만.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마음이 카페를 향한 열정으로 이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하루에 30명씩 손님이 온다고 어림셈해 보면, 남자는 약 한 달 후에 운명의 손님을 만나게 될 것이었다. 남자는 구백(900)하고도 아흔두 번째 손님이 초록색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긴장하고 있었다.

*** (가운데 정렬 해주세요!!)

   “야, 대박. (˵¯͒⌄¯͒˵) 완전 네 스타일인 사람 발견했어.”

   커피를 사러 집 근처 카페를 다녀온다던 김지인이 ㅡ걔 손에는 커피가 아닌 진녹색 말차가 들려 있었지만ㅡ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아주 좋은 타이밍에 흥미로운 소식이었다.

풀리지 않는 과제를 붙잡고 있은지 벌써 3시간이 훌쩍 지났다. 까만 목폴라 스웨터에 까만 슬랙스를 입고, 몇 가닥 안 되는 머리를 왁스로 잘 넘긴 A 교수는 생각보다 더 까칠했다. 전공 책에 등장하는 영단어의 어원을 찾아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울며 겨자 먹기로 꼬부랑글씨를 몇 자 적고 있다 보니 어느새 내 노트는 낯선 외국어로 빼곡히 차 있었다. 어떤 이야기라도 이보다는 재밌을 것 같았다. 김지인이 또 어떤 엉뚱한 소리를 하나 한번 들어보자는 심정으로 고개를 들어 휴대폰 속 사진을 확인했다.

*** 

   “딸랑.”

   찰랑이는 긴 생머리를 한 여자가 한 손에 반짝거리는 가방을 들고 카페 문을 열었다. 진한 청색 바지가 길쭉한 다리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걱정과 다르게 천하고도 여섯 번째 손님은 여자였다. 그것도 아주 미인이었다. 그 손님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는데 모든 말을 시작할 때, ‘엇…’ 이라는 추임새를 붙였다. 이를테면, ‘엇…, 영수증은 괜찮아요’, ‘엇…, 감사합니다.’ 같은 식이었다.

   남자는 절망했다. 추임새 따위가 문제는 아니었다. 이 손님이 천하고도 여섯 번째 손님이라 짐작은 되지만, 문제는 그 숫자가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첫하고도 여섯 번째 손님이 투명한 바지를 즐겨 입던, 민트초코를 좋아하는 입맛을 가지던, ‘오잇’ 혹은 ‘웽’하는 추임새를 더하던 상관은 없었다. 남자가 아무리 빠르게 머리를 굴려 보아도 이 손님이 천하고도 여섯 번째 손님이라는 것을 도무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앞서 정한 규칙에 따라 남자에겐 이 손님이 반드시 정확하게 천하고도 여섯 번째 손님이어야 했다. 그래야 사랑을 시작할 수 있었다. 남자가 복잡한 머리로 과테말라 원두를 추출하고 있는 사이,

   “딸랑.”

ㅡ남자의 계산이 맞다면ㅡ 천하고도 일곱 번 째 손님이 들어 왔다.

*** 

   진짜였다.

   내가 진짜로 그리던 사람이었다. 내 안에 잠자고 있던 사랑 세포가 깨어나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A, T, G, C로 이루어졌던 내 염기서열이 L, O, V, E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아, 나에게도 이런 날이 오고야 마는구나. ❉𓂂(◕˓˳◕ )𓂂❉ 사진 속에는 한 남자가 하얀 셔츠를 입고 웃고 있었다. 웃을 때 입 꼬리 근처로 짧은 주름이 지며 눈이 반달이 되는 웃음. 이 웃음을 가진 사람은 배우 A외에 절대 존재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김지인이 찾아내 버린 것이다. 김지인은 동공이 커질 대로 커진 내 눈을 보며 마치 승리자라도 된 양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랜 시간 다듬어져왔던 그 계획을 실행할 때가 온 것이었다.

*** 

   천하고도 여섯 번째 손님을 맞았으니 더는 손님 수를 세지 않아도 되련만 남자는 자연스레 손님의 머리 위로 1007이라는 수를 띄웠다. 천하고도 여섯 번째 손님에게 커피를 건넸다. 머릿속이 복잡해진 남자가 무어라 말할 틈도 없이 그 손님은 왼손에 커피를 들고 재빠르게 카페를 빠져나갔다. 남자는 기진맥진한 얼굴로 1007번째 손님을 맞았다. 1007번째 손님은 남자에게 좋아한다고 말했다. 남자는 여전히 기진맥진한 얼굴로 하루만 달라고 말했다. 찬찬히 오늘 다녀간 손님의 수를 세어 볼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1007번째 손님은 우리 카페 로고가 박힌 냅킨에 자신의 전화번호를 남기고 사라졌다.

   남자는 영업 시간이 2시간이나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일찍 문을 닫았다. 보안상 설치해두었던 CCTV와 주문 기록을 대조해 보며 정확하게 수를 세 나갔다. 역시 이럴 줄 알았다. 오후 1시 22분 쯤 몰려든 손님들과 부쩍 긴장한 남자 덕에 구백하고도 아흔여섯 번째 숫자부터 완전히 잘못되어 있었다. 1007번째라고 착각했던 여자가ㅡ남자를 좋아한다고 말했던ㅡ 그토록 기다리던 1006번째 손님이었다. 남자는 안도했다. 천하고도 여섯 번째 손님을 찾아냈다.

   남자는 곧바로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끊기고 통화 연결이 시작되자마자 외쳤다.

   “저도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