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호《종합캔디》: 해열제맛 등딱지

19편째 풋소설

2024. 5. 7.

19회 (2024.05.08)

5월호 주제 《종합캔디》

해열제맛 등딱지

우정

다래는 오늘도 오렌지 꿈을 꾸었다. 벌써 며칠째 꿈에 나타나는 오렌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당연히도). 그저 굴러갈 뿐이다. 데굴데굴. 세면대 앞에 서면 거울엔 우스운 꼴을 한 여자가 비친다. 참으로 겁 많은 여자가 아닐 수 없다. 자신의 뒤를 쫓아오지도 않는, 그저 구르는 오렌지에 겁을 먹다니.

도착한 카페의 유리창 안으로 친구들의 모습이 비쳤다.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것은 꽤나 오랜만이었다. 근황을 나누는 친구들 틈에서 다래는 입을 꾹 닫고만 있었다. 몇 년째 반복되는 일상에 추가된 것이라고는 불어난 몸무게뿐인데다 요즘 오렌지 꿈을 꾸고 있어, 하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해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다래는 자신의 손톱 거스러미만 뜯어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그때 반짝거리는 로즈 골드 색상의 팔찌를 찬 손목이 다래의 시야로 들어와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다래는 요즘도 만화 그려?”

오늘 이 자리에 다래를 불러낸 장본인인 지은이었다.

“응. 알바하면서, 쉬엄쉬엄.”

다래는 대답하면서도 지은의 손목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골드도 실버도 아닌 로즈 골드가 이렇게 잘 어울릴 수가 있나. 피부가 하얘서 그런가. 그치만 나도 하얀 걸로는 지지 않는데. 시선은 서서히 손목에서 팔뚝으로 옮겨갔다. 지은은 한여름에 입어도 추워 보일듯한 민소매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몸을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부드럽게 지는 주름과 은은하게 도는 광택. 다래는 금세 자신의 상상력으로 지은을 회사 사무실 안으로 옮겨 놓았다. 지은은 소매가 없어 자유롭고 한결 가벼운 두 팔로 업무를 처리하고, 이마를 짚기도 하고, 크게 기지개를 켜기도 했다.

한편 친구들은 다래에 관한 이야기로 한창이었다. 아직까지도 다래의 만화가 나오던 요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친구부터, 하루는 선생님께 만화 노트를 압수당하자 반 아이들 모두가 침울해졌다는 일화까지. 그러고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다래에게 안타까움을 표했고, 그제야 다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은은 무거워진 분위기를 눈치채고 대화 화제를 돌리려는 듯 가방을 뒤적거렸다. 그러자 기대에 찬 탄성이 화음처럼 쏟아졌다.

‘신부 하지은’

모임에 잘 나가지 않던 다래가 기꺼이 이곳에 자리한 이유는 지은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함이었다. 카드를 받아 들은 다래는 지은의 이름 옆에 붙은 두 글자가 낯선 지 한참을 만지작거렸다. 지은은 뭐든지 선두 주자로 달렸다. 스물 중반엔 취업이었고, 이제는 결혼까지. 지은이 개척하고 후일담을 들려주면 그 뒤로 친구들이 한 걸음씩 발을 내딛는 식이었다. 그리고 다래는 언제나 그 행렬의 끝에 있었다.

먹고 떠들다 보니 어느덧 밤이었다. 헤어질 무렵 친구들은 돌아가며 지은과 포옹을 했다. 그중 몇은 다래에게도 다가와 잘 될 거라는 응원과 함께 등을 쓰다듬고 갔다. 그러나 다래는 그 손길에서 따스함이 아닌 뜨거움을 느꼈다. 뜨거워서 데일 것만 같았다.

오월의 밤은 아직 서늘했고 여름은 올 생각을 않았다. 다래는 걸으며 생각했다. 나, 슬퍼야 하는 건가. 로즈 골드빛 팔찌도, 민소매 블라우스도 어울리지 않는 시시한 어른이 되어버린 것에. 언제부턴가 다래는 친구들과 만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흔들리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아닌 세상이, 가만있는 자신을 두고는 마구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다래는 자신의 삶에 만족했다. 편의점에 출근해 손님이 없는 시간대에 틈틈이 만화를 그리고, 퇴근 후에는 정갈한 밥상을 차려 먹고,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으며 휴식한 후 다시 만화를 그리는 일상을 보내고 나면 자신에게 딱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았다. 근사하지는 않지만 적당한 삶이라 여겼다. 그러나 사람들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받고 나면 스스로를 안쓰럽게 여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다래는 어지럼증을 느끼며 버스에 올라탔다. 집에 도착하려면 1시간쯤 걸릴 듯했다. 이어폰을 꺼낼 여력도 없어 창문에 이마를 대고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모든 것들이 너무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버스의 속도에 다래는 구역감을 느꼈다. 잠시 정차한 버스의 창 너머로는 주황빛의 물체가 아른거렸다. 크기로 짐작하건대 대형 트럭 같았다. 그것이 자신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었다. 동그란 형체가 가까워질수록 버스의 몸체를 타고 묵직한 진동이 전해졌다. 잠깐, 동그랗다고?

분명 오렌지였다. 꿈에서 보았던 오렌지가 거대해져 차도 위를 구르고 있었다. 다래는 하차벨을 누르고 정신없이 버스에서 뛰어내렸다. 도로는 거대 오렌지의 등장으로 혼비백산이었다. 다래는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랐다. 이런 곳으로는 오지 못하겠지, 하며. 그러나 좁은 골목길로도, 계단이 있는 육교로도, 깊숙한 지하차도에도 조금만 숨을 돌렸다 하면 이내 코를 찌르는 시트러스 향과 함께 오렌지가 그녀의 뒤를 쫓았다. 집은 점점 더 멀어지고 목은 타들어갔다. 팔다리에 남아있던 기력마저 옅어지고 있었다. 더 이상은 뛸 힘이 없었다.

“왜 나한테만 그러는데, 왜!!”

제 발에 걸려 엎어진 다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이름 모를 뒷산에서 오렌지에 깔려 죽을 운명이라니. 부정해 봤자 안쓰러운 인생인 게 맞았던 거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그리다 만 만화 작업 파일이었다. 아직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데. 읽어주는 사람이 없대도 계속해서 그리고 싶었는데. 누가 뭐래도 나는 내 만화를, 내 삶을, 아니 나를, 참 좋아했는데.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어쩐 일인지 공포스러운 시트러스 향도 풍겨오질 않고, 둔탁한 소리도 나지 않았다. 뒤도 돌아보지 못한 채 두려움에 몸을 바르르 떨며 자신이 맞이할 최후를 떠올리던 다래의 마음속에 어느덧 무모한 용기의 씨앗이 생겼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발악이라도 해보자. 다래는 손을 뻗어 두꺼운 나뭇가지를 잡았고, 오렌지가 뒤쫓아오던 방향으로 돌며 크게 휘둘렀다.

다래의 등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천천히 침을 삼키며 오렌지가 오기만을 기다려도 변하는 것 없이 그대로였다. 그저 바닥에 자그마한 주황빛의 물체 하나가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주위엔 작은 불개미들의 행진이 일어나고 있었다. 다래는 그것을 주워 불개미와 흙가루를 털어내고는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반질반질하고 자그마한 것이, 상큼한 향이 났다. 다래는 그것을 입에 넣었다. 어릴 적 먹던 해열제 시럽 맛이 났다. 기분 탓일지 잔뜩 올랐던 열이 확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다래는 오렌지보다도 오렌지 맛 사탕을 더 좋아했다. 오렌지 맛 사탕은 오렌지 맛이 아니었다. 짝퉁 오렌지 맛도 아니었다. 그건 그냥 ‘오렌지 맛 사탕’맛이었다.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했다. 다래는 생각했다. 이거면 되는 거 아닌가. 겁에 질려 달리다가 엉덩이에 불이 붙을 바에야 빛나는 오렌지맛 사탕을 등에 올리고는 뙤약볕 아래를 느릿하게 기어가고 싶었다. 사탕은 무력하게 녹아내릴 것이다. 그리곤 굳어 단단한 등딱지가 될 터였다. 다래는 일어서서 무릎을 털었다. 집은 멀리에 있었지만 조금도 서두르지 않았다. 사탕을 녹여먹으며 세상에서 가장 느린 걸음으로 걸었다. 오렌지가 쫓아올 염려는 하지 않았다.

쫓아오면 또 어쩔 텐가. 그냥 오렌지일 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