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호《종합캔디》: 우리 박하에서 만나

🍏 5월호《종합캔디》: 우리 박하에서 만나

20편째 풋소설

2024. 5. 10.

🍏 5월호《종합캔디》: 우리 박하에서 만나

20회 (2024.05.11)

5월호 주제 《종합캔디》

우리 박하에서 만나

허운

진짜 왔네?

어 왔지. 너도 드디어 왔네.

10년만인가?

9년 만이지.

박하에서 보자더니.

박하에서 만났잖아.

그건 우리가 열여섯 여름에 맺은 약속이었다. 아파트 단지 재건축으로 영어학원이 문을 닫던 날, 우리는 학원 사탕 바구니에 담긴 종합캔디를 양 주먹 가득 집어 도망쳤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도망칠 일도 아니었다. 그거 뭐 얼마나 한다고, 아마 우리가 두고 온 사탕은 다 버려졌을 거다. 하지만 그땐 원장 선생님의 ‘1일 1사탕 원칙’이 헌법보다 더 엄중하게 느껴졌다. 한참을 달린 우리는 아파트 앞 벤치에 나란히 앉아 사탕을 까먹기 시작했다.

너는 무슨 맛이 제일 좋아?

모르겠어. 너는?

나는 다 별로야. 너무 달고 또 달아.

뭐야, 그럼 왜 그만큼이나 가져왔어?

그냥. 맨날 하나씩밖에 못 가져가게 하니까 약 올라서.

그게 뭐야, 하여튼.

나는 박하 맛 사탕을 하나 까서 입에 넣으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건조한 사탕을 입안에 요리조리 굴리자 슬슬 들큼한 단맛이 감돌았다.

...나는 박하 맛이 제일 좋은 거 같아.

뻥이었다. 새콤달콤한 과일 맛 사탕들에 비하면 박하 맛은 정체성을 제대로 살리지 못해 화하지도 상쾌하지도 않은 맛이 영 어정쩡했다. 심지어 그날은 꿉꿉하고 더워서 그 애매하게 눅눅한 맛이 불쾌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학원에서도 항상 제일 많이 남아있는 맛이었으니까, 그냥 너를 놀리고 싶어서, 니가 입에 사탕을 넣는 순간 나는 뱉어 버리고 “구라지롱”이라고 외칠 생각으로 던진 말이었다.

진짜? 그럼 나도.

너는 곧바로 주머니를 뒤지더니 박하 맛을 하나 꺼내 까먹었다

....괜찮네. 박하만 먹고 나머진 동생 줘야겠다.

너는 사탕을 굴려 한쪽 뺨에 밀어 넣고 나를 바라봤다. 갑자기 사탕을 뱉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 대신 설움이 북받쳤다.

재건축 정말 싫어. 학원 옮기는 것도. 이제 이 벤치도 없어질 거 아냐.

나는 지난봄에 등받이에 붙여 둔 두 개의 스티커를 만지작거렸다.

그러게. 나도 이사 가기 싫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너는 다시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박하 맛 사탕을 골라내 손바닥 위에 모았다.

둘, 넷, 여섯 개. 너는?

나도 주머니에서 사탕을 모두 꺼내 박하 맛의 개수를 셌다.

난 두 개.

너는 사탕 두 개를 나에게 건넸다.

자 이러면 네 개씩. 아껴 먹어. 그리고 먹을 때마다 연락하자. 박하에서 만나는 거야.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고, 나는 그날 저녁 개를 산책시키다가 사탕을 모조리 잃어버렸다.

*

나는 이해가 안 돼.

사탕을 잃어버려서 너한테 연락할 수가 없었어.

그게 말이 돼?

사실 박하 맛 자체도 별로였어. 지금 먹는 건 민트야. 맵고 코가 뻥 뚫리는 유럽 산 민트. 나도 이제 단 게 싫어졌거든.

너는 황당하다는 듯 가만히 나를 바라봤다. 나는 말을 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너는 지금 어디에 있어? 어떤 사람이 됐어?

지금 여기 있잖아, 우리 약속 장소. 너 사탕 물고 잠들었어. 어떤 사람인지는... 글쎄, 여긴 네 머릿속이라. 나 어떤 사람인 것 같아?

아, 그런 거구나. 어쩐지. 우리가 만날 리 없는데. 이렇게라도 자주 볼 걸 그랬다. 매일 박하 물고 잘 걸.

됐어. 한 번 봤으니까 이젠 안 올 거야. 괜히 사탕 물고 자지 마. 충치만 생겨.

그럼 잠에서 깨고 연락해도 돼?

진짜로 연락하게?

어. 그래도 돼?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소용이 있겠어. 나는 넌데.

너는 가면을 벗어 던지더니 거울로 변했다. 그리곤 차가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다 그만해. 벌써 10년이야.

아직 9년이라며.

지금 그게 중요해? 이거 꿈이라니까?

순간 너의 거울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9년 전 네 얼굴이 되었다가 내 얼굴이 되었다가 엄마 얼굴이었다가 아빠 얼굴이었다가 시계, 사자, 양, 장미, 토끼, 양철인간, 카드병정, 해바라기, 고양이 얼굴로 변했다. 나는 덤덤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그래도 보니까 좋다. 그땐 미안했어. 내가 표현을 잘 못 해서.

얘 말이 안 통하네. 나는 걔가 아니라니까? 나는 차라리 걔를 제외한 모든 것에 가깝다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다신 안 올 거라며.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네가 뭐라든 너는 내가 박하에서 만나기로 한 그 사람이고, 나는 너를 드디어 만난 거야.

나는 공중에 떠 있는 고양이 얼굴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눈을 뜨니 입안엔 박하 맛 사탕이 작게 남아있었다. 나는 소파 테이블 한쪽에 놓인 종합캔디 봉투를 집어 쓰레기통 앞으로 갔다. 그렇게 남은 사탕을 모두 버렸다. 부엌으로 가 텁텁해진 입을 헹구며 생각했다. 이젠 정말 잊을 때도 됐다고.

작가의 말

충치 치료비 반 내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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