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에 은근한 햇살이 눌러 붙기 시작한 5월에 다연은 사라졌다. 나는 마지막으로 다연을 보았던 순간을 떠올렸다. 며칠 전, 신호등 불빛이 초록으로 바뀌었는데도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는 다연을 보았다. 한 손에는 얼음이 다 녹아 묽어진 아메리카노를 들고 다른 손은 왼쪽 허벅지 언저리를 애매하게 맴돌고 있었다. 겹겹의 감정들이 다연의 주위를 꿰차고 있는 모양새가 마치 눈으로 보이는 듯 했다. 그 모양새 안에서 다연은 뭐랄까. 너절해보였다. 테이크아웃 커피의 컵 홀더는 물기에 찢겨 허름해보였고 컵을 든 다연의 눈빛엔 물기가 없어 건조했다. 신호등이 초록에서 빨강으로, 다시 빨강에서 초록으로 바뀔 때까지 한참을 그렇게 서 있을 것만 같았다. 줄곧 그곳에만 머물러 온 사람처럼.
내가 다연을 좋아하게 된 것은 단순하고 필연적인 이유에서였다. 다연은 나를 보면 눈을 맞추고 싱긋 웃곤 했다. 그럴듯한 미소에는 항상 얇은 막이 존재했다. 널 좋아하지만 특별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야, 그런 방패 같은 것. 처음엔 그 표정이 왠지 꺼림칙했지만 동시에 다연을 둘러싼 그 막은 언제든 뚫릴 것처럼 얇아 보이는 탓에 나는 다연 주위의 답답한 공기를 서서히 좋아하게 되었다. 또 언젠가, 왜 매일 커피를 마시냐고 물었을 때 오늘을 가뿐히 넘기기 위해서라고 답하던 다연은 마치 등 뒤에 둔중한 짐 덩이를 얹은 것 같아 보였기 때문에. 자기의 불행을 은근한 자랑으로 여기는 애들 사이에서 오직 다연만이 늘 말을 아꼈고, 그럼에도 매일 아침 커피를 사서 느지막한 오후가 될 때까지 눅진해진 종이 빨대를 붙들고 있는 다연의 꾸준함이, 질긴 불행에 꿋꿋이 맞서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다연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좋다하는 그 한다연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사라져버린 거였다.
다연을 닮은 뒷모습만 보면 눈으로 쫓는 일을 슬슬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할 때쯤, 다연이 나타났다.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고 앉아 있는 내 앞에, 10년 전 열여섯의 모습으로. 10년 전의 다연이 나타났다고 말하는 게 맞을지, 다연은 어쨌든 다연이었으므로 그냥 다연이 돌아왔다고 말하는 게 맞을지 고민했지만. 아무튼 나는 단번에 다연을 알아보았다. 작아진 체구와 뽀얀 피부는 다연의 본 적 없는 열여섯 즈음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그런데 그게 가능한 일인가, 사람이 시간을 거슬러서 도로 어려진다는 일이? 다연의 살짝 올라간 입 꼬리와 멍한 눈을 완벽히 닮았으나 이토록 어린 다연은 그럼 대체 누구란 말인가, 머릿속이 혼란해졌을 때 다연이 말을 걸었다. 원래도 나보다 반 뼘쯤 작았던 다연이 나를 거의 올려다보며 나 다연이 맞아 나 좀 도와줘, 라고 했다.
잠시 후 다연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요새 커피를 못 마셨거든. 속도 메스껍고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불쾌하게 뛰는 게 짜증나서. 그래서 안 마신 지 한 일주일쯤 됐나. 갑자기 이렇게 됐어. 어려져 버렸어. 다연은 어려진 자신의 몸을 훑어보더니 울상을 지었다. 나 진짜 어떡해, 이게 뭐야. 커피를 마시지 않았더니 어려졌다는 다연의 단순명쾌한 설명을 이해하기 위해 나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겨우 물었다. 그럼 너는 지금 몇 살인거야? 당연히 그대로 스물여섯이지, 몸만 돌아간 거야. 몸만 어려진 거라는 다연의 대답이 미심쩍었다. 항상 풍기던 씁쓸한 커피 향 대신 다연의 입안에서 굴려지고 있는 카푸치노 사탕의 단 냄새가 어색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다연의 표정과 말투에는 열여섯의 기운이 물씬 풍겼기 때문이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은 열여섯의 한다연이 틀림없었다.
왜 이런 일이 생겼다고 생각해? 내가 묻자 어린 다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예전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어. 누가? 나 말이야. 나는 늘 머물러 있는 느낌이었거든. 남들은 잘만 넘어가는 시기에 혼자 남아서, 지나온 시간을 단물 빠질 때까지 질겅질겅 씹는 거지. 어린 다연은 이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하필 이 모습일까? 나는 이 나이 때쯤이 가장 싫었는데. 왜? 뽀얗고 귀엽기만 한데. 내 말에 어린 다연이 사춘기 학생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난 이때쯤, 그러니까 10년 전 쯤 고통스러운 순간이 많았어. 그렇지 않은 때를 찾는 게 더 어려울 만큼.
몸이 어려져서 그런지, 그때처럼 마음도 힘든 기분이야. 숨이 잘 안 쉬어져서 자꾸 가슴을 쳐. 그맘때쯤 내가 딱 그랬거든. 밤에 자려고 눈을 감을 때마다 아침이 돼도 눈을 뜨지 못하는 묘한 상상을 하곤 했어. 그러면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놓였던 것 같아. 그런데 아침이면 꼭 눈이 떠졌지. 그러면 하루 종일 또 목에 돌이 든 것처럼 조여 오고, 가슴을 주먹으로 쿵쿵 치고. 그렇게 말하는 어린 다연의 멍한 눈과 어른 다연의 건조했던 눈빛이 순간 겹쳐 보였다.
어른 다연이 오늘을 가뿐히 넘기기 위해서 매일 커피를 마신다고 했던 것이 생각이 났다. 다연이 말한 오늘은 그저 오늘 뿐이 아니었다. 오늘은 지나온 기억들로 부풀어 오른 시간의 집합체였고, 현재와 나란히 흐르는 옛 시간들을 다연은 오롯이 감당해내야 했다. 어른 다연이 매일 마신 커피는 병렬로 흐르는 모든 것들을 감당하기 위해서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어린 다연의 모습을 한 어른 다연이 안쓰러워졌다. 어떻게 하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그러니까, 지금의 다연으로. 내 물음에 어린 다연이 커피 맛 사탕을 오독오독 씹으면서 말했다. 시간이 순서대로 흘러야겠지. 어린 나는 어린 나대로, 어른 한다연은 한다연대로. 숨통이 조금 트일 거야. 그러면 나는 … 어른이 될 수 있겠지?
어린 다연이 입을 열면 카푸치노 사탕의 향내가 공기를 가득 채웠다. 나는 어린 다연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위에서 아래로, 다시 위에서 아래로. 모든 건 머무르지 않고 무사히 지나갈 거라는 의미에서. 숨이 부족해서 가슴을 쳤던 기억 모두. 잠이 들 때면 이만 안식에 드는 상상을 하곤 했던 날들까지. 병렬로 흐르는 시간 속에서, 진득하게 머무르는 시간으로부터. 다시금 어른이 된 다연은 비로소 모든 것들로부터 아주 버젓하게 독립하게 될 거라는 소망을 담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