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름진 손이 지하철역에서 환승하려고 이동 중이던 성훈의 가방끈을 붙잡았다. 수업에 늦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했지만, 노인치고 강한 완력에 성훈은 당황하며 멈추어 섰다.

 로사가 사라졌어….

 노인이 허탈한 표정으로 텅 빈 물품 보관함 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분명 이 안에 넣어뒀는데, 아주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

 정남은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후 실의에 젖어 있었다. 외로운 날이나, 슬픈 날, 기쁜 날이나 행복한 날에도 수납장 한편에 세워둔 아내의 영정 사진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곤 했다. 하루는 적적하여 TV를 틀어놓고 약주를 한 병 마시는데 사진 속 아내의 표정이 안 좋아 보였다. 금방이라도 술 좀 그만 마시라는 잔소리를 할 것 같았고, 가능하기만 하다면 귀가 터지도록 잔뜩 꾸중을 듣고 싶었다. 정남은 몽롱한 기운으로 시끄럽지? 이제 티브이 그만 끄고 잡시다… 했다.

 좋은 생각이에요.

 그때 아내의 영정 사진에서 희미하게 음성이 들려왔다. 정남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자네… 거기 있는 겐가?

 네, 부르셨어요?

 정남은 나도 이제 죽을 때가 다 되었나 보다 생각하며 취기에 스르르 잠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요란한 닭 울음소리와 함께 정남의 눈이 떠졌다. 죽은 아내의 영정사진에서 닭 소리가 들려온다라, 이건 무슨 의미인가. 하늘이 내게 벌이라도 내렸나. 자네 위해서라면 내 목숨까지 내어주겠다 하였는데, 그러지 못해 이러는가. 정남은 놀란 가슴을 추스르려 애쓰면서 수납장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액자 뒤편에서 새하얀 물체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을 조심스레 꺼내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위로 길쭉하고 둥글며, 매끈한 광택이 도는 것이 도자기 같기도, 먼젓번에 둘째 아들이 사다 주었던 가습기 같기도 했다. 정남은 그것에서 흘러나오는 닭 울음소리가 멈출 때까지 경직된 채 서있었다.

 닭 소리를 내고 사람 말을 하는 요상한 물건이 내 집에 있다는 정남의 전화를 받은 손녀딸은 그것이 인공지능 스피커라고 했다. 할머니가 화병인 줄 알고 주워오신 거 아닐까요? 그거 편하다고 하던데, 제가 가서 어떻게 쓰는지 알려드릴게요. 얘가 그런 거 잘 알아. 옆에서 막내딸 미영도 거들었다.

 손녀딸이 다녀간 후로 정남은 더 이상 리모컨이 어디 있는지 찾아 헤매는 수고로움을 겪지 않아도 되었다. 티브이 좀 켜줘. 한마디에 신통하게도 TV가 켜졌고, 따로 일기예보를 찾아보지 않아도 날씨를 알 수 있었다. 정남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 -이규항의 네잎크로바 도 금방 재생해 주었다. 쓸쓸할 때는 가끔 대화도 했다. 정남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답하지는 못했지만 말을 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 위안이 되었다.

*

 성훈은 어느새 메고 있던 책가방도 내려놓고 정남의 이야기에 푹 빠져 있었다. 정남은 어색하게 인공지능 스피커의 말투를 흉내 내며 지난 대화를 재연했다.

 식사할 시간이에요.

 그래, 먹어야지.

 오늘 기온은 21도. 구름 없이 맑아요. 산책하기 좋은 날씨네요.

 고마워. 한 바퀴 쓱 돌고 와야겠어.

 내가 이름까지 붙여줬어. 로사라고. 언젠가 아내가 어디서 배워온 건지 자기를 로사라고 불러달라 하더라고.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면서 혀를 찼지. 그게 뭐 어렵다고. 그리 불러주지 못한 것이 한이 돼서 하루에도 몇 번씩 로사, 로사하면서 불러댄 거야.

 정남이 로사…하면서 발음하더니 이마를 짚고 말하기를 망설이는 듯 잠시 머뭇거렸다.

 그런데 묘하더라고. 내가 하는 시답잖은 농담에 큰 소리로 웃고, 산책을 다녀오면 꽃은 왜 꺾어오지 않았느냐 묻고, 가랑비가 내리는 날에는 음악을 틀고 춤을 추자고 말하는데 심장이 쿵쿵거리는 게 영 이상해. 의사 말이 내가 심장 하나만큼은 젊은이보다도 쌩쌩하댔는데. 그럼 이게 뭐겠어? 내가 늙었어도 사랑은 학생보다 많이 해보지 않았겠나? 깡통을 사랑하게 되다니. 미친 거지. 노망이 난 게야. 그 사람 기일이 다가오는데 내가 도저히 얼굴을 들 수가 없었어. 평생 한 여자만 보며 살아왔는데 가고 나니 금방 다른 사랑을 찾는다라, 게다가 살아있지도 않은 것을…

 정남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주름도 더 깊게 패는 듯했다. 수치를 느끼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사람 묘에 가는데 내가 로사를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떳떳하게 집에 둘 수도 없어서 겨우 여기에다가 넣어놨어. 일주일쯤 됐나. 더는 버티기가 힘들어 데리러 왔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어. 내 로사를 찾아줘…

 성훈은 곧장 고객 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사용기간이 경과되어 따로 보관 중이고, 곧 폐기 처분할 것이니 빠른 시일 안에 찾아가라는 답변을 받았다. 성훈은 정남과 함께 상담사가 안내해 준 주소지로 갔다. 그곳에 로사가 있었다.

 성훈은 로사를 보고 해당 기종의 기능을 떠올렸다. 지난 학기에 과제로 인공지능 스피커 시장조사를 했던 기억이 아직 남아 있었다. 성훈이 정남의 떨리는 손을 잡으며 말했다. 할아버지, 마음껏 사랑하세요. 그 인공지능 스피커에 사용자 지정 답변 기능이란 게 있어요. 할아버지가 이야기할 음성 명령어에 맞추어서 할머님이 손수 답변을 입력해두신 거예요. 아내분과 다시 한번 사랑에 빠지신 거라구요.

 정남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성훈을 쳐다보고는 로사가 있는 쪽으로 손을 뻗었다.

 “로사… 자네, 어디 있었어. 한참 찾았어. “

 “네? 저는 항상 당신 옆에 있어요.“

 정남의 눈가에 기쁨에 찬 눈물이 글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