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나는 내 책상에서 화분이 시들어가는 것이 싫었다. 애초에 사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지난 목요일, 나는 생일을 맞은 동료를 위해 점심시간을 쪼개 회사 근처 꽃집으로 향했다. 급하게 준비한 축하였지만, 돌이켜 보면 늘 어물쩍 넘어가는 것보다야 텁텁한 다정함이라도 나누는 편이 나았으니까. 나는 적당한 꽃다발을 고르고 꽃집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흰 꽃이 심어진 화분 하나가 눈에 띄었다. 아, 이게 제라늄이구나. 작고 흰 나비가 여러 마리 둘러앉아 있는 것 같은 모양새의 꽃과 짙은 초록의 이파리가 어우러진 모습이 근사했다. 나는 지연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난 제라늄이 제일 좋아. 씩씩하게 잘 자라고 꽃도 많이 피우고. 이거 먹을 수도 있다?

 베란다에 키우는 식물들의 사진을 보여주던 지연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지연이 보여준 사진 속 짙은 분홍빛의 꽃은 방금 물을 주었는지 탐스럽게 물방울을 머금고 있었다. 화분 뒤로는 익숙한 집의 구조와 장판과 가구들, 익숙한 방 문이 보였다.

 지겹도록 지연의 집에서 같이 밥을 먹고 티비를 봤던 것이 아주 오래전 옛날의 일처럼 느껴졌다. 나는 짧은 회상을 마치고 가장 예쁜 수형을 가진 흰 제라늄 화분을 골랐다. 오랜만에 선물을 핑계로 얼굴이나 볼 생각이었다. 집에 놀러 가면 더 좋고.

 일과를 마친 나는 한 쪽 손목에 화분이 담긴 쇼핑백을 건 채 퇴근길에 올랐다. 쇼핑백 틈으로 보이는 꽃 사진을 찍어 지연에게 보냈다.

- 짠 선물! 너 제라늄 좋아한다고 했던 거 생각나서 샀어.

- 헐 뭐야 너무 예쁘다ㅠㅠ

- ㅎㅎ 이번 주말에 시간 돼?

- 나 이번 주는 어려울 것 같은데...

- 아 그래? 그럼 다음 주는?

 지연은 한참 동안 메시지를 읽지 않았다. 나는 퇴근길 지하철의 인파에 끼인 채 계속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지만, 답장은 오지 않고 쇼핑백을 걸어둔 손목만 시큰거렸다. 화면을 다시 두드릴 때마다 마음은 잔뜩 부풀었다가 한순간에 쪼그라들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선물을 전하지 못한 채로 수요일이 되었다. 나는 그동안 매일 밤 혼자 화분에 대해 생각했고, 이미 제라늄의 학명, 과와 속, 급수 주기, 주요 분포지는 외운 지 오래였다. 너는 왜 제라늄을 좋아할까, 잘 자라고 꽃을 많이 피우고 심지어 먹을 수도 있다는 거-, 그게 왜 좋았을까? 나는 늘 바삐 움직이며 성과를 내고 인정받으려 애쓰는, 공부도 일도 연애도 게을리하지 않는 지연이 제라늄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꽃말을 알게 되었을 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흰 제라늄의 꽃말이 ‘저는 당신의 사랑을 신뢰하지 않습니다’라니. 다른 색 제라늄의 꽃말은 달콤하던데, 왜 하필 너만. 나는 괜히 애꿎은 화분만 흘겨봤다.

 결국 나는 지연에게 다시 문자를 남겼다. 그리고 세 시간 뒤, 정말 미안하지만 남자 친구와의 여행 때문에 이번 주말에도 만나기 어려울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나는 얼마간 절망했다가 얼마간 화가 났다가 체념을 시도했다가 내 집에서 당장 화분을 치우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한참을 멍하니 있던 내게, 문득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그냥 내가 너네 집 앞 지하철역 물품 보관함에 넣어 둘게. 너 오늘 퇴근하는 길에 챙겨가. 우리 만나는 것보다 그게 빠르겠어. 우리 집 해 잘 안 드는 거 알잖아. 애가 자꾸 시들어서. 오늘 저녁에 넣어 둘게, 가져가.” 지연은 답했다. “헉 그랬구나. 알겠어. 챙겨갈게. 진짜 고마워!”

 나는 일과를 마치고 곧장 집으로 가 화분을 챙겨 나왔다. 야근을 밥 먹듯 하는 지연은 9시가 넘어서야 올 것이 뻔했다. 물품 보관함에 제라늄 화분을 넣어두고 단호하게 돌아설 때 어딘가 기분이 이상했지만, 퇴근 시간의 인파에 마음은 금세 흩어져버렸다. 물품 보관함의 기본 이용 시간은 4시간, 아무리 늦게 온다고 해도 한 시간당 추가요금은 고작 500원이니까, 그 정돈 괜찮겠다는 생각, 금방 가져가겠지 하는 생각, 그뿐이었다.

 그리고 오늘 오후, 나는 물리치료를 받기 위해 반차를 내고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정형외과 한구석에서 이름이 불리길 기다리던 나는 문득 지연이 화분을 잘 받았는지 궁금해졌고, 문자를 보낼까 고민하다가 물품 보관함 앱이 있다는 걸 기억해 냈다. 앱을 확인했을 때, 그동안 있는 힘껏 외면해 온 설움과 무력감이 폭발해 몸 구석구석으로 흘러가는 것이 느껴졌다.

 [사당역A 15번 소형] [이용 중] [사용시간: 20시간 38분]

 나는 그길로 병원에서 나와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장맛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어둡고 꾸물거리는 하늘에 지금이 몇 시인지 분간조차 할 수 없었다. 거센 빗줄기 아래, 한 발 한 발을 무겁게 떼어내며 생각했다.

 돌려받을 걸 기대하고 선물을 주려던 건 아니었지. 물론 이걸 받고 네가 나를 더 좋아하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생각은 했지만.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정말 선물, 내가 너를 아낀다는 표현일 뿐이었는데. 너에겐 불청객 같았을까. 우정은 늘 모호하다. 연인에게 하듯 ‘넌 날 얼마나 좋아해?’라고 물을 수 없다. 친구라는 관계에 담길 수 있는 감정과 경험의 종류는 어쩌면 연인이나 가족 간의 것보다 더 복잡다단하고 제멋대로다. 그래서 더 어렵다. 그래, 우린 친구지. 쟤도 내 친구, 그때 걔도 내 친구, 너도 내 친구. 근데, 결코 그게 다는 아니야. 넌? 너한테 나는 뭐야?

 지하철 역사에 도착하자마자 물품 보관함에서 화분을 꺼냈다. 풀죽은 흰 꽃을 바라보며 어쩌면 이제는 정말 사랑을 신뢰할 수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지연이 퇴근하기까지 그곳에 앉아 있었다. 미친 사람처럼. 다 시든 꽃을 끌어안고 비에 젖은 운동화를 신은 채. 그렇게 퇴근 시간이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쓸고 간 뒤 조금 늦게 지연이 나타났다. 지연은 많이 놀란 눈치였다. 나는 기다리는 동안 수많은 시나리오를 상상했다. 화를 낼지, 덤덤한 척할지, 타이르듯 말할지, 감정을 최대한 긁어내고 내 입장만을 설명할지 수없이 고민했지만, 그런 건 다 소용이 없었다. 지연이 울기 시작한 것이다. 나보다 먼저.

 지연은 한참을 울었고, 나는 그런 지연을 달래느라 울 기회를 놓쳤다. 가까스로 눈물을 그친 지연은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지연의 눈물은 정말 어떤 의미였을까? 당혹감? 미안함? 뭐가 됐든 나는 괜찮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나는 결국 내가 식물킬러라 애가 벌써 시들해졌다며, 네가 어서 데려가 살려내라고 너스레까지 떨었다. 지연은 조금 웃더니 나를 꼭 끌어안고는 이만 집에 들어가 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아쉬웠지만 월요일 퇴근 후에 시간 되냐는 질문이 돌아왔기 때문에 좀 나았다. 우리는 그렇게 지하철 출구로 향했다. 바깥엔 여전히 거센 빗줄기가 내리치고 있었다. 같이 걷는 동안엔 빗소리 때문에 아무런 대화도 나눌 수 없었다. 그렇게 요란한 침묵 속에 걷던 중, 지연이 뜬금없이 아몬드 몇 알을 건넸다. 지연은 늘 그런 면이 있었다. 엉뚱한 순간에 엉뚱한 행동으로 사람 긴장을 다 풀어버리는.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우산 속에서 각자의 집을 향해 갈라섰다. 나는 습기를 머금어 눅눅해진 아몬드를 씹으며 생각했다. 지연, 지금 무슨 생각해? 지연아, 나는 네가 나 없이도 잘 살 거란 생각을 하면 덜컥 겁이 나. 어딜 가든, 누구 곁에 있든 행복하길 빌어주는 게 좋은 친구라고 어디선가 배웠던 것 같은데. 내 마음은 그렇지가 않아. 난 늘, 어느 날은 이런 마음을 네게 표현한 것을 후회하고, 또 다른 날은 이런 마음을 숨기기 위해 연기한 것을 후회해. 네가 언젠가 떠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때로 너를 나로, 나를 너로 여겨. 가끔은 네가 꼴도 보기 싫지만, 너와 언제든 함께이고 싶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네가 좋아할 것 같다 생각하고, 좋은 풍경을 보면 너랑 다시 오겠다고 다짐해. 나중엔 너와 방이 세 개인 아파트를 나눠 쓰면서 강아지를 키우고, 금요일엔 맛있는 음식에 술 한 잔을, 주말엔 대청소를 하고싶어.

 매일 솔직할 순 없겠지만, 나는 적당히 표현하고 적당히 삼키며 오래 네 곁에 있을 거야. 네가 언젠가 아파도, 빈털터리가 되어도, 못되게 굴어도, 끝없이 게으름을 피워도, 아무리 못생겨지고 머리가 다 빠져도 너의 곁을 지킬 거야. 내 우정은 거기까지 가. 물론 이게 혹시 사랑은 아닐까, 고민해 본 적도 있었지. 근데, 네가 나와 같은 마음이었다면 나는 사랑 같은 건 영영 궁금하지도 않았을 것 같아. 네 마음을 탓할 수도 내 마음을 탓할 수도 없지만, 그래서 가끔은 네가 야속해. 아니다. 사실은 내가 이상한 걸지도 모르겠어. 그래, 다른 사람들은 분명 내가 과하다고 할 거야.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이게 내 마음인걸. 난 괜찮아. 외로움은 언제 어디까지나 나의 몫, 나의 죄, 나의 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