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항상 그 물품보관함이 네 것인 양 굴었다. 비밀번호를 누르는 네 손은 일말의 망설임도, 조금의 두근거림도, 순간의 쉼도 없었다.

 나는 그런 네게 고마웠다. 소름 끼칠 정도로 안정적이고 따뜻한 삶을 가진 내가 조금은 불쌍해 보일 수 있었으니까. 네가 다녀감으로써 나는 비극적인 주인공이 될 수 있었으니까.

 너랑 물품보관함 비밀번호를 공유한 건 너랑 나와의 비밀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유독 다른 것들에 한눈팔기를 쉽게 하는 네가, 아주 조금이라도 나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수를 쓴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비밀번호는 ‘비밀’번호니까. 우리 사이가 조금 더 애틋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주문이라도 걸듯. 자주 가는 카페의 드립백이나 귀여운 캐릭터 달력을 선물하는 것보다는 그게 특별할 것 같았다. 

 ‘우린 비밀을 나눈 사이야.’

 나에게 비밀번호는 그런 의미였다.

 네가 그 번호를 자주 누른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네가 무슨 요일, 몇 시에 비밀번호를 누를지 몰라서 늘 마음을 졸였다. 네가 번호를 누를 때 모든 것이 완벽히 준비되어 있어야 했다. 네게 거슬리지 않는 시큼한 민트향의 분자가 공기 중을 떠다녀야 했고, 발밑으로 치이는 수건이나 머리카락 따위가 시각을 자극하지 않아야 했으며 적당한 습도와 적당한 온도, 적당한 살색이 그곳에 자리해야 했다. 그러나 너는 애쓰는 나를 몰라야 했다. 네 앞에서만큼은 여유로운 손짓으로, 최대한 흉내 내보는 시원한 웃음을, 따뜻한 눈빛으로 건네려 애썼다. 물론 개중에 그 어떤 것도 네가 요청한 것은 없었다.

 너는 늘 다른 옷을 입었지만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다정한 말투. 단정한 소매. 새하얀 운동화. 시원한 웃음. 왼쪽의 보조개. 따뜻한 눈빛. 또 따뜻한 눈빛. 너는 비밀번호를 누르고 새하얀 운동화를 벗고 왼쪽 보조개가 더 선명해지는 시원한 웃음을 지으며 따뜻한 눈빛과 다정한 말투로 인사를 건네고 단정한 소매를 단정하게 걷어 손을 씻는다. 나는 그 모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모른다. 네가 그렇게 웃고, 그렇게 묻고, 그렇게 보면 어쩔 줄을 모르겠다. 어떤 것을 어찌해야만 할 것 같은데 그 어떤 것이 어떤 것인 줄을 모르겠다. 그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버릴 수만 있을 것 같았다. 때로는 정말 궁금하기도 했다. 너를 위해 얼만큼을 버릴 수 있는지. 소중한 것들을 나열해 본다. 우리 엄마아빠. 까미. 김예진. 이소희. 아이폰 6s. 진분홍색 일기장, 땡땡이 민소매 원피스, 서울숲, 말차 빙수···.

 하나도 없다. 버리지 않을 것이 하나도 없다.

 네가 다녀간 후에 나는 네가 더 이상 비밀번호를 누르지 않을까 두려웠다. 이번에 함께한 시간이 네 맘에 들지 않았을까 봐, 내가 준비한 수백 가지 중 한 가지가 네게 거슬렸을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네가 가고 나면 한참을 서성이며 눈물을 흘려야 했다. 네가 밝혔다가 꺼뜨린 공간은 무섭고 슬펐다. 너는 눈이 멀 정도로 밝은 데다 온몸이 녹을 정도로 뜨겁기까지 했기에. 온기가 저버린 공간에서 망상하고 공상하고 중얼거렸다. 

 네가 너무나도 컸다. 가시 돋친 병사들로 방어벽을 촘촘하게 세울수록 너는 더 커지기만 했다. 하루는 탱크를 타고, 하루는 F-104 전투기를 타고, 하루는 타임머신을 타고 가벼이 침입해 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수월히 허물어졌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방어벽을 따로 구축해야만 했다. 네가 떠난다고 이야기하기 전에 언제든 내가 그만둘 수 있고 싶었다. 작전은 이랬다. 네가 ‘그만’이라는 백기를 들기 전에 그 낌새를 눈치채고 내가 먼저 선수 치는 것. 실제로 나는 너보다 오래도록 괴로워하고 그리워하다가 곤란해지겠지만서도 이 관계를 시작한 이상 종료는 내가 선언해야 했다. 그러나 가만 지켜보면 작전은커녕 바보같은 굴레에 갇혀 빙빙 돌기 바빴다. 

 ‘나를 떠나지 마. 내가 틀린 것이 있다면, 네 심기를 건드린 것이 있다면 고칠게. 내게 등 보이지 마. 제발 나를 떠나지 마.’ 

 하다가도, 

 ‘그래. 어차피 떠날 사람이었어. 나도 그렇게 큰 마음은 아녔어. 떠날 테면 떠나라지’ 

 하다가도, 

 ‘우리가 보냈던 시간들이 이렇게 한순간에 사라지는 건 말이 안 돼. 내가 쏟은 마음들이 너무 아파’ 

 하다가 또, 

 ‘나를 떠나지 마 제발’ 

 했다. 

 물품보관함 비밀번호를 알려주고 초조해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나는 그게 이상했다. 권 대리도, 김 사원도, 이번에 들어온 박 인턴도 비밀번호 공유가 그들을 초조하게 만들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그들과 다를 바 없이 안 초조한 척을 했다. 그까짓 거 뭐 남들 다하는 거 아니냐며 너스레를 떨었지만서도 글쎄. 입으로 치장한들 눈으로 다 발가벗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매일 같이 했다. 어떻게 하면 비밀번호를 공유하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건지, 어떻게 혼자 치과에 가고, 능숙하게 젓가락질을 하고, 조용히 도서관에 앉아 할 일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나는 그런 마음이 못되었기 때문에, 비법이 있다면 알려달라고 사정하고 싶었다. 

 결국은 다 내 잘못인 것 같아서, 내가 이런 사람이라서 이렇게 된 것만 같아서 슬펐다. 복잡하고 불리한 게임에 참전한 건 다 내 탓이다. 네 잘못은 하나도 없었다. 넌 그저 일방적으로 비밀번호를 건네받은 사람일 뿐이었다. 네게 잘못을 전가하고자 핑계를 꼽자면 1) 시답잖은 내 하루를 궁금해했던 것, 2)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운동화를 신었던 것, 3) 거울을 보며 소매를 단정히 정리했던 것, 4) 저도 모를 따뜻한 눈빛을 쏘아대었던 것, 5) 아버지를 닮은 시원시원한 입매로 시원시원한 웃음을 가져버린 것, 이 정도가 있겠다. 

 처음부터 네게 물품보관함 비밀번호 따위를 알려주는 게 아니었다. 내게 물품보관함이 있다는 것도, 그 물품보관함이 성수역 5번 출구에 있다는 것도 알려주는 게 아니었다. 그 대신 다음에 네가 온다면 이런 말을 해야겠다. 너는 나랑 놀기에는 너무 잘나고 아름다워서 우리는 안된다고. 

 아니, 내가 너무 잘나고 괜찮아서 너랑 맞지 않는다고. 그렇게 얘기해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