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늙어버렸으면 좋겠어. 연수는 종종 습관처럼 종알댔다. 얼마나? 내가 물으면 고민하는 척 늘 비슷한 답변을 내놓았다. 음, 눈 감았다 뜨면 한… 마흔 다섯쯤으로? 한쪽 눈을 찡그리고 턱을 왼쪽으로 살짝 기울이며 그렇게 말할 때. 연수는 이미 너무나 어른 같아 보였다. 

  하루살이도 내일을 걱정할까? 어느 날은 연수가 혼잣말인 척 내 생각을 물었다. 아무래도 덜 하겠지? 당장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내가 그렇게 대충 대답하고 나서, 연수의 표정이 눈에 띄게 환해졌던 게 생각이 난다. 표정에서 그런 게 읽혔다. 정말 그렇겠구나, 하루살이는 하루 만에 죽으니 마음이 편하겠구나. 왠지 모를 후련함이 얼굴을 뒤덮었을 때 연수는 천진한 아이 같아 보였다. 바닥에 떨어진 과자를 주워 먹어야 할지 아닐지 따위가 인생 고민의 전부인. 작디작은 아이. 

  다만 나는 불안해졌다. 하루 빨리 늙어버리고 싶다던 연수가 하루살이의 운명에서 무언가 해답을 찾았다는 것이. 내일을 걱정하지 않을 방법을 깨닫자 그토록 후련해졌다는 것이 불길했다. 그때쯤 나는 연수를 집착적으로 감시했다. 꼭 그래야 할 것만 같은 강박에 사로잡혀서 오늘은 밥을 어떻게 차려 먹을 건지, 무얼 하며 하루를 보낼 건지, 기다리고 있는 택배가 있진 않은지, 택배 배송일은 언제인지 따위를 물었다. 잘 먹고, 잘 보내고, 택배가 올 때까진 잘 살아보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실은 상당 부분이 나의 안식을 위함이었다. 해소해야 할 불안감이 있었다. 연수가 하루살이의 운명을 선택할 거라는 불안. 마음 급한 연수만의 방식으로 여생의 총량을 전부 소진해버리고, 육신만을 남겨두고는 어딘가로 떠날 거라는. 하루 만에 나이 들어 하루 만에 죽어버릴 거라는.

  변한 건 없었다. 연수는 여전히 종알대며 예의 그 유쾌한 방식으로 침묵을 채우는 편이었고, 나는 그에 적당히 응해주며 우리는 늘 그렇듯 서로 균형을 맞추었다. 내 집착적인 감시도 점차 줄어 갔다. 나의 시선에서는 안정에 가까웠던 일상 속에서 무뎌져간 것은 오직 나뿐이었다. 연수의 시간은, 하루 빨리 늙는 것과 하루만 더 사는 것 사이에서 고민에 빠진 채로 치열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

  더는 못 견디겠어. 술을 마시다가, 벌게진 얼굴에 부릅뜬 눈으로 연수가 나직하게 말했다. 1월이었다. 모두가 새해를 환영하는 때. 그런데 갑자기 연수의 입에서, 마치 하루살이의 종말 같은 말이 불쑥 튀어 나온 것이다. 나는 무서워졌다. 

 “더는 견디기… 뭘?”

 어물어물 말끝을 흐리며 묻자 연이어 연수가 늘어놓은 말들엔 거침이 없었다. 

 “풋과일에서는 신맛이 나. 난 신 게 싫어. 맛없고 짜증나. 그래서 더는 못 견디겠어.”

 우리는 술안주로 파인애플을 먹고 있었다. 덜 익었는지 파인애플에서 신 맛이 난다고 불평하던 건 오히려 내 쪽이었는데. 그저 술안주일 뿐인 파인애플 조각에서 삶의 고통을 떠올린 건 연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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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너 신 거 못 먹잖아.”

 되도 않는 맞장구를 치고 있는 내 앞에서 연수는 말을 이어나갔다. 들숨 다음 날숨에, 가슴팍에 여분의 자리가 필요한 듯 모든 걸 와르르 쏟아내고 있었다.

 “난 너무 어려. 빨리 늙어버리면 좋겠어. 젊음, 청춘, 실수. 그런 것들 전부 건너뛰고 단숨에 폭삭 익어버리면 좋겠어. 플랜 에이를 세웠다가, 플랜 비를 세웠다가, 다시 플랜 에이를 뒤적이는 거. 하루만 잘 살자 싶다가도 하루만 잘 살아서 뭐하나 싶어서 자책하는 거. 그 무엇도 잘해내지 못하는 거.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워서 남들 앞에 드러내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는 거. 다 싫어. 견딜 수 없이 끔찍해…. 그만하면 안 될까?”

  연수의 큼지막한 눈이 나를 향했다. 어쩌면 나를 본 게 아니라 눈을 그저 내 쪽으로 둔 건지도 몰랐다. 연수는 울고 있었다.

 “나도 나를 좋아하고 싶어. 그런데 좋아하는 것보다 미워하는 게 훨씬 쉬워.”

 연수는 몇 번을 되뇌었다. 나도 나를 좋아하고 싶어. 좋아하고 싶어.

*

  연수는 그날 이후 조용했다. 종알댐은 잦아들고 그저 조용했다.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 너무나 진실에 가까운 것이라면, 그건 언제나 연수를 후회하게 만들었다. 포장되지 않은 진실은 그저 속엣말일 때가 편안했다. 민망한 고백은 언제나 스스로를 자책하게 만드니까. 연수는 내게 고통의 부담을 지운 것 같아 미안했다.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연수는 그토록 고요했고, 침묵 속엔 관성 같은 배려가 스며있었다.  

  내가 무턱대고 연수의 집 앞에 찾아간 건 일주일쯤 뒤였다. 현관문을 두드리고 등장한 연수의 낯빛에는 놀람과 약간의 부끄러움 끝에, 환희가 맴돌았다. 내가 손에 쥔 파인애플을 보자 연수는 희미하게 웃었다. 한참 덜 익은 걸로 골랐어, 아주 신 걸로. 그렇게 말하며 파인애플을 통째로 연수의 미간 앞에 들이밀었다. 다 익으려면 일주일 정도 걸린대. 그렇게 말하자 연수는 이내 들어오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나는 더없이 일상적인 발걸음으로 연수의 공간에 침범했고, 그걸로 내 고백을 대신했다. 파인애플이 완전히 익고 나면, 물렁해진 식감에 형체가 애매해지고 나면. 그때는 파인애플 조각에서 무르익은 달콤함이 느껴지기를. 그때까진 네가 오늘을 살아내고, 늙지 않고 그대로 있어주기를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