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렵 주연은 나를 썩은 풋사과라 부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덜 익은 과일이 썩어버릴 수 있냐 물었다. 파란 사과를 오븐에 넣고 구운 듯 물러버렸다며 나를 비난했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만들었냐며 안타까워했다. 술은 마신 다음 날이면 사람을 더욱 추잡스럽게 유혹한다는 주연이 유혹을 저버리지 못하며 한 말이다. 나는 입꼬리를 내리며 웃었다. 명확하게 좋아하던 주연의 모습이었다눈치는 더럽게 빠르군. 역시 자식 이름은 부모가 지어야 돼. 나를 그렇게 만든 것은 주연이었다.

-너는 언제나 내가 만나는 여자애들을 불쌍해했잖아.

  주연에게 마음을 고백하고 나서 문자 메시지로 받은 문장이었다. 속으로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보일러도 틀지 않은 차가운 바닥에서 잠들었다. 홍이는 종종 내게 연애 상담을 했다. 주연의 두 번째 여자친구였다. 둘은 연애 관계를 전부 없던 일로 하자고 합의를 봤댔다. 그러자고 하면 그렇게 되는 건가. 존재를 존재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던 예술가들은 이렇게 간단한 일을 뭣하러 머리를 쥐싸매고 고민했단 말인가. 홍이는 어려운 일을 거장보다 쉽게 해내는 여자였다. 주연이 홍이를 사랑했던 이유도 그러했다. 그러니 주연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이유도 알만하다. 나는 쉬운 일도 어렵게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지름길을 찾기 위해 아는 길을 세 번씩 돌아가는 사람이었으니, 당연하다. 새로 만난 홍이의 남자친구 이야기를 들었다. 물음표 붙은 반응 하나 없음에도 말을 지속하던 홍이와는 늙고 나이 먹은 남자친구가 주변에 있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 홍이는 서로를 소개해주고 싶다며 우리를 불렀다. 덩그러니 남은 한 자리를 사이에 두고 나는 주연을 향해 사랑이 뭐냐는 진부한 질문을 했다.

  홍이는 자주 임신 가능성에 대해 불안해했다. 만나는 많은 남자 사이에서 걸릴 수 있는 성병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크게 두려워했다. 세상에 백 퍼센트의 확률을 가진 건 도대체 무어냐며 되려 화를 냈다. 처음에는 공감했고, 두 번째는 그런 건 죽음밖에 없다고 했으며, 세 번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는 죽음조차도 백 퍼센트의 확률로 다가오는 필연인지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시간 여행을 영원히 끝마치지 못한다면 죽음마저 나의 것이 아니게 된다.

   나는 주연을 처음 만난 호프집에 앉아있었다. 수치스러운 마음으로 침대를 옆에 두고 맨바닥에서 잠든 다음 날의 일이었다.

   여느 시간 여행자가 그렇듯 부정과 혼란의 시기를 거쳐 나는 일 년을 반복했다. 같은 일기장을 세 번째 다시 쓰고 있었다. 그 사이에 많은 사실들을 수집했다. 세 살이 많던 주연과 나이가 같아지는 해였다. (물론 내가 사는 세계에서만 통용되는 나이였다.) 주연은 매해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였다. 일을 그만 두는 것, 음악을 시작하는 것, 갑자기 사주 맹신자가 되는 것, 틱톡커로 데뷔해서 떼돈을 버는 것(내가 일년을 반복하면 주연의 떼돈도 허상처럼 사라졌다.), 영화를 찍겠다며 내게 끔직한 대사집을 들이미는 것, 홍이와 사귀는 것 혹은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 그리고 헤어지는 것 혹은 헤어지지 않는 것. 같은 것은 나였다. 나는 여전히 다양한 주연에게 사랑이 무어냐는 어린이 같은 질문을 했다.

  다른 주연은 매번 다른 대답을 했다. 그래서 혹여나 다른 주연이 같은 나를 사랑하지 않을까 기대했다. 변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이 어려운 나는 홍이처럼 행동하기와 같은 쉬운 길을 선택하지 못했다. 주연과 모른척 하룻밤을 보내거나 전부 없던 일로 하자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같은 일을 수백번 반복하더라도 주연에겐 처음의 순간이 아닌가. 매년의 주연은 마치 나보다 자신의 일년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다른 행동을 했지만, 내게 주연은 처음의 것과 다를 바 없다.

  한 번의 주연은 어떤 여자들에게 매력을 느꼈다. 한 번의 주연은 그런 여자들에 대해 치를 떨었다. 한 번의 주연은 사실 그런 건 전부 상관 없다고 말했다. 나는 언제나 그런 건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떤 주연도 나를 사랑하진 않았다. 주연은 마치 결과를 전부 아는 사람처럼, 혹은 코딩으로 입력된 기계처럼 내게 ‘너는 언제나 내가 만나는 여자애들을 불쌍해했잖아.’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나면 익숙한 일년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