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 그리고 정지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세상은 금세 멀어질까

스물넷 취업 준비생 김채담

토익 학원에서 귀가하는 길에 맨홀에 빠졌다.

발목과 어깨가 욱신거린다.

다행히 그밖에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지만,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가 막막하다.

핸드폰 배터리도 없는 상황.

한기가 짙어 갈수록 주변엔 적막이 감돈다.

어느새 들리는 것은 자신의 숨소리뿐이다.

채담은 고민했다,

어떻게 빠져나갈지가 아닌

어쩌다 이곳에 들어왔는가를.

결론적으로 채담은 토익 학원에 간 것을 후회했다.

스마트폰으로 요리 경연 프로그램을 보며 밤길을 걸은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어쩌자고 그랬지?

도대체 왜 이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채담은 혼란에 빠졌다. 배가 살살 아팠다.

급하게 저녁을 욱여넣고 학원으로 달려갔던 것이 누구의 의지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 에너지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왜 지금 불끈 솟아나 날 맨홀에서 꺼내 주지 않는지 몇 번이고 되물었다.

대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다시 침묵. 영영 이대로 멈춰 있어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팔과 다리를 간지럽혔다.

자신이 떨어진 구멍만을 올려다보던 채담은

달빛마저 구름 뒤로 자취를 감춰

꽉 막힌 어둠이 닥쳐왔을 때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키보다 조금 낮은 폭의 관이 좌우로 길게 이어져 있었고

어느 지점부터는 어둠으로 뭉개져 그 끝을 알 수 없었다.

맨홀은 구멍이 아니라 길일 수도 있겠다고

채담은 처음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걸음을 떼지는 않았다.

어둠 끝의 빛이 아니라

단지 어둠을 향해 걷긴 싫었다.

채담은 다시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무 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오직 공백만이 거기 있었다.

사회의 복잡다단함에, 쌓이고 얽히고 꼬이는 관계에

그토록 싫증을 냈었는데

하룻밤도 지나지 않아 도로 갈망하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채담은 이제껏 꼴딱 새 온 밤들을 떠올리며

날은 금방 밝으리라 생각했다.

곧 새가 짹짹짹 벌레가 찌르르르

부지런한 노동자들이 기약 없이 출근하고

시뻘건 해가 터오겠지.

내일이 나만 비껴가진 않겠지. 죄 없는 나를.

이라고 되뇌었다.

그대로 하루가, 이틀이, 일주일이 지났다.

시간은 그렇게 채담을 두고 갔다.

시절은 그만 채담을 잃어버렸다.

그럴 수도 있다는 걸, 맨홀에 빠지기 전엔 몰랐다.

채담은 이제 해가 뜨고 지는 것을 세지도 않았다.

단지 사다리에 기대 마른 입을 뻐끔거리기만 했다.

‘도와주세요. 잘못했어요. 이대로 외롭게 죽느니 밖에서 닳아 없어질래요.

나 없이도 다들 잘 사네요. 민폐 안 끼칠게요. 제발 꺼내 주세요.’

언제 잠에 들었을까,

주변이 밝고 부산스러워 채담은 눈을 떴다.

병원이었다. 운이 좋았다. 응급실에 자리가 있다니.

곁엔 잠든 엄마가 있었다.

채담은 엄마를 깨웠다.

토익 수험서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

침대에 앉아 공부했다.

맨홀에 빠졌던 얘기를 자소서에 썼다.

입사했을 땐 모두가 채담을 맨홀이라 불렀다.

채담은 그 얘기를 들을 때마다 하하 웃었다.

채담은 질겁했고 맨홀은 웃었다.

채담은 아직 그 맨홀이 있는 동네에 살았다.

채담은 하하 웃고 돌아오는 길마다 맨홀 뚜껑 위에 웅크려 앉았다.

그리고 그 아래로 뻗어진 고요한 길을 떠올렸다.

채담은 제 발로 올라온 기억이 없다는 걸,

그래서 실은 아직 저 밑에서 침묵하고 있다는 걸,

맨홀만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