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월호《정체기》: 포크를 들지 못하는

51편째 풋소설

2024. 10. 18.

51회 (2024.10.19)

10월호 주제 《정체기》

포크를 들지 못하는

진희

[서초역 7번 출구]

역 에스컬레이터를 타면서 출구를 바라보면 거대한 건물을 배경 삼은 출구 표시가 보였다. 다시는 오고 싶지 않던 곳이었는데, 보경은 한숨을 쉬었다. 보경은 오랜만에 무릎보다 짧은 치마를 입어 다리가 신경쓰였는지 왼쪽에서 성큼성큼 올라가던 평소에 비해 손잡이에 손을 대고 에스컬레이터가 올라가길 가만히 기다렸다. 내려서 3분 정도 걸으면 채린과 세노를 만나기로 한 카페가 있었다. 또각또각 소리가 나는 발, 무릎 위의 짧은 치마, 얇은 셔링 소재의 나시, 한쪽 어깨에 걸친 핸드백. 모든 것이 12년 전의 모습과 달랐다.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서초의 한 고등학교. 12년 전의 보경은 저곳에서 체육복 반바지와 반팔티를 입고 머리를 꽉 묶은 채로 학교를 뛰어다녔다. 채린과 세노의 손을 꼭 잡으며.

약속한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햇빛이 환하게 비치는 창가 자리에 채린과 세노는 커피와 케이크를 시켜놓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보경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당황했다. 보경의 삶이 소년 만화였다면, 친구들은 10년 전과 다름없어서 옛날처럼 웃고 떠들었겠지만 안타깝게도 보경은 평범한 실제 삶을 살고 있었고 12년이라는 시간은 과거와 현재를 분리시키기 좋은 시간이었다.

“보경!”

채린은 손을 위로 휘휘 저으며 보경을 불렀다. 보경은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환한 미소를 짓고 채린과 세노의 이름을 부르며 빠르게 걸어갔다.

“오랜만이다, 그치. 채린이랑 나는 조금 일찍 도착해서 먼저 시켜놨어. 우리 치즈케이크 좋아했잖아. 나눠먹으려고 기다렸어.”
“아, 고마워. 근데 나 세노 머리 긴 모습만 봤었는데, 이렇게 머리 짧은 모습 보니까 새롭다.”
“머리? 머리 그냥 일하는 데에 방해돼서 잘라버렸어. 나 피트 시험 치고 약대 갔었거든. 아침마다 머리 감고 실험할 때 머리 묶고 하는 게 귀찮아서 잘랐었는데, 생각보다 편해서 이렇게 사는 중. 생고생해서 피트 쳤더니 이제 피트 사라졌어.”

말을 끝내고 세노는 포크를 들어 치즈케이크를 한 입 베어먹었다. 채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그럼 이제 세노 약사네? 진짜 멋있다.”
“고마워. 채린이는? 요즘 뭐하고 지냈어.”
“나는 00 기업 개발자로 일하다가 지금은 육아휴직했어. 너네 내가 청첩장 보냈을 때, 아무도 못 왔잖아. 나 벌써 2살짜리 애기 키워.”
“너 엄마야? 대박이다. 나는 진짜 엄마들이 제일 존경스러워. 일하던 곳도 엄청 좋은 곳인데, 육아휴직 내기 아까웠겠다.”
“좀 아깝긴 했는데, 그래도 애기 얼굴 보면 내길 잘 한 거 같아. 오래 붙어있고 싶거든.”

채린은 휴대폰을 꺼내 아기 사진을 여러 장 보여주며 자랑했다. 기분이 좋아진 채린은 행복하게 포크로 케이크를 잘라 먹었다.

“애기 채린이 너 닮아서 진짜 귀엽다. 이름은 뭐야?”
“이름, 보현이야. 그러고보니 보경이 너랑 이름이 비슷하네. 보현이도 너처럼 멋있게 자라야 할텐데.”

보경은 케이크를 먹으려 포크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세노는 포크를 만지작 거리는 보경에게 안부를 물었다.

“보경이는 요즘 뭐해?”

보경은 채린과 세노와 학교를 다닐 때, 셋 중에서 제일 공부를 잘했다. 전교권까지는 아니었지만, 중상위권을 유지했고 보경은 내심 자기가 셋 중에서 가장 예쁘다고 생각했다. 지금 보경은 대학원을 졸업해 휴식 겸 취업 준비 기간을 가진 지 1년이 넘었고 그동안 음식점 아르바이트로 간간이 돈을 벌고 있었다. 대학원에 박혀서 공부만 하고 음식점에 정신없이 출근하다보니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이라고 생각했던 믿음은 깨진 지 오래였다. 매일 밤마다 야식을 먹으면서 생긴 피부 트러블도 많았다. 그에 반해 채린과 세노는 열심히 자기관리를 한 것 같았다. 심지어 채린은 출산 후에 체중을 관리했는지 군살 하나 없는 몸이었고 학생 때, 못생겼다고 생각했던 세노는 안경을 벗고 머리를 깔끔하게 정리하니 모델 같아 보였다.

“나…는 요즘 쉬고 있어. 대학원 졸업한 지 얼마 안돼서.”
“쉬는 거 진짜 중요해. 나는 대학교 졸업하고 못 쉰 게 한이야.”
“맞아. 나도 약국 하기 전에 좀 쉬려고. 해외 여행 갈거야.”

보경은 원래 교수까지 하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의 재능과 끈기는 턱없이 부족했다. 논문이 창의적이지 못했고 그렇다고 아주 세심하게 쓰지도 못했다. 교수님과 선배들의 비평을 견디기에는 너무 힘겨웠고 가끔 물흐르듯 생기는 부조리를 어쩔 수 없다고 넘기는 여유가 있지도 못했다. 보경은 결국 석사까지 하고 그만두었다. 취업을 하기엔 스펙이 없었다. 겨우 만들어낸 ‘석사 졸업’은 흔치 않게 볼 수 있는 문구 중 하나였다. 하루종일 대학원에 틀어박혀 있느라 친구들과는 거의 다 연락이 두절되었고 3년 만난 애인은 네 짜증을 도저히 못들어주겠다며 보경을 떠나갔다. 돈이 다 떨어질 때쯤, 보경은 앞치마를 둘러매고 쌀국수를 팔기 시작했다. 채린이 개발자로 몇 천을 저금하고 육아를 시작할 동안, 세노가 피트를 치고 약대에 들어가 약사 준비를 할 동안.

보경은 오늘이 끝나면 채린은 집에서 아이와 함께할 것이고 세노는 해외 여행 준비를 할 것이란 걸 알았다. 자신은 동네에서 쌀국수를 6시까지 팔고 집에 와서 드러누울 것이라는 것도. 보현은 다시 포크를 만지작거렸다.

셋이 헤어질 때까지 치즈케이크가 묻은 포크는 두 개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