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훈 씨와 나는 곧 백 일을 앞둔 연인이다. 세 달이면 보통의 연인들이 충분히 깊어지고도 남을 시간이지만, 그도 나 못지않게 조심스러운 성격의 소유자라 어색함이 풀어지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서로의 이름을 편히 부르게 된 것도 최근의 일이다.
그가 나를 처음으로 이레야, 하고 불렀을 때 나는 우리가 더 가까워진 것 같아 기뻤고,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했다. 그가 나를 이레 씨라고 부를 때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더 멋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그에게 도로 이레 씨라고 불리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말을 꺼내본 적은 없다. 그런 부탁을 하는 것은 아직 부끄러우니까...
우리는 주말마다 만나고 있다. 서로의 집이 가깝지 않아서 평일에 만나는 것은 무리다. 그래서 나는 그를 만나는 주말만 손꼽아 기다린다.
그런데 도훈 씨는 매번 약속에 늦는다. 가장 짧게는 5분부터, 길게는 한 시간도 기다려봤다. 처음엔 실수였겠거니 하며 넘어갔지만 반복되다 보니 참지 못하고 이유를 물어보게 되었다. 이유는 때마다 달랐다. 잔업을 처리하다가, 책을 읽다가, 고장난 물건을 스스로 고쳐보려고 하다가, 미뤄두었던 대청소를 하다가… 무언가에 열중해야 할 때는 시간 감각이 사라지고 중요한 것마저 잊어버리게 된다는 사실을 나도 모르는 게 아니다. 근데 왜 하필이면 나를 만나는 날에만. 억울하고 서운했지만 비죽거리려는 입술을 늘 애써서 감추곤 했다. 평일 간 업무에 치이며 힘들었을 사람을 들쑤셔 쉬는 날까지 피곤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으니까.
나도 이제 어엿한 스물 중반이다. 사랑은 마구 조르고 닦달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그는 지각하는 습관만 뺀다면 너무도 완벽한 나의 이상형이다. 시원한 인상에 몸은 적당한 근육질이라 바라보기만 해도 흐뭇해지고, 나의 의견을 존중하면서도 결코 우유부단한 성격은 아니기에 마음 놓고 기대고 싶어진다. 일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거나 진지한 대화를 나눌 때면 선했던 눈매가 진해지는 것이 어른다운 분위기를 풍기지만, 웃을 때는 꼭 소년 같아서 싱그러운 느낌을 준다.
그런 그와 만나면서 이제껏 내가 해왔던 것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중이다. 그간 내가 사랑이라 불렀던 것은 전부 유치하고 자기중심적인 애정의 갈구였을 뿐이다. 상대의 사정은 고려하지 않고 오직 나만 바라봐 주기를 요구했다. 꼬박 삼 년을 만났던 전 연인의 음식 취향을 나는 알지 못했다. 또 일 년이 조금 안 되게 만났던 전전 연인이 서운할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도 몰랐다.
반면 지금의 나는 메뉴가 수백 가지는 되는 백화점 푸드코트에서 도훈 씨가 먹지 못하는 메뉴들을 피해 식당을 고를 수 있고, 가장 좋아할 만한 식당이 어딘 지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튀김옷을 입은 고기와 신선한 채소를 함께 먹는 걸 즐긴다. 튀김옷이 얇고 바삭하며, 드레싱은 채소의 맛을 해치지 않아야 가장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또 그의 미세한 표정 변화는 오랜 소꿉친구만큼이나 잘 알아차릴 수 있다. 나는 그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다. 나를 봐달라고 보채는 대신에 그를 한 번이라도 더 바라보게 된다. 기름으로 번들거리는 입술마저 사랑스럽고, 가끔 눈치 없이 굴어도 답답하기는커녕 귀엽기만 하다. 어쩌면 그를 만난 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가 늦지만 않는다면 정말 완벽할 텐데.
*
어김없이 주말, 우리는 연인이 된지 백일째 되는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만나기로 했다. 도훈 씨는 전화로 ”내가 이레 집 쪽으로 갈게, 5시에 보자.“ 했다. 5시라… 그는 보나 마나 늦을 것 같았다. 전화를 끊고나자 불쑥 그런 마음이 들었다. 나도 하루는 좀 늦어볼까, 하는. 기분 좋은 날에 속 좁은 행동을 해서 기념일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으나 나의 현명한 이성도 잔뜩 심통이 난 마음속 어린아이를 진정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 늦은 6시쯤 유유히 등장할 계획을 세웠다. 그가 오래 기다린 것처럼 보여도 절대 뛰지 않을 거고, 이유를 묻는다면 어물쩍 넘어갈 것이다. 그냥 ”좀 늦었지? 미안.“이라 말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팔짱을 껴야지. 그에게는 약간의 긴장감이 필요한 것 같다. 아무래도 내가 잡은 고기라고 생각해서 마음을 놓고 있는 게 분명하니까.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할 것이다. 내가 온전히 그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안겨주는 거다.
저녁 6시, 나는 역 출구 앞에 도착했다. 계획했던 대로 절대 뛰지 않았다. 어차피 높은 하이힐을 신어 뛰고 싶어도 뛸 수 없었다. 나는 일부러 또각또각 하는 구두 소리를 더 크게 내며 걸었다. 선명한 구두굽 소리가 늦은 박자로 도훈 씨의 마음에 꽂힐 때면 그도 생각하겠지. 사랑하는 연인이 이토록 초조한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도훈 씨는 보이지 않았다. 함께 갔었던 근처 카페에도, 내가 자주 앉아서 그를 기다리고는 했던 나무 벤치에도 없었다. 맞은편에서 화사한 꽃다발을 든 연인이 걸어와 나를 스쳐 지나갔다. 옳지. 그렇구나. 꽃다발이라도 사서 깜짝 놀라게 해줄 생각인가 보군. 귀여운 구석이 있는 사람이니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그럼 전날 미리 예약을 했어야지, 또 나를 기다리게 하다니. 그래도 그런 이유에서 늦는 것이라면 용서할 수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그가 무슨 꽃을 사 올지 상상했다.
얼마쯤 기다렸을까. 몸이 오들오들 떨리기 시작했다. 이제 겨울이 오려는 듯 저녁이면 제법 추웠다. 나는 몇 시간 전의 나를 말리고 싶었다. 이 날씨에 겉옷도 챙기지 않은 데다 미니스커트까지… 게다가 평소에 잘 신지도 않던 구두를 신어서인지 점점 발가락이 아파왔다.
찬바람에 정성스레 말아낸 머리카락이 얼굴을 치는 순간 나는 다짐했다. 그가 오면 힘껏 정강이를 걷어차버려야지. 앞 코가 뾰족한 구두를 신었으니 몇 배는 더 아프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슨 말부터 해줄까. 너를 만나 연애를 시작한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 아닌, 실수였다고 할까. 다시는 보고 싶지도 않다고 할까. 너 같은 애인은 정말이지 최악이라고, 울면서 마음을 아프게 만들어줘야 하나. 어떻게 해야 그가 땅을 치면서 후회하게 만들 수 있을까 심각하게 고민하던 찰나에 도훈 씨가 저 멀리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시계를 보니 7시 12분이었다. 그가 이마와 콧등에 맺힌 땀을 닦으며 말했다.
“이레 씨, 미안해요. 정말로….”
부드럽고 달콤한 음성이었다. 또 들을 수만 있다면 지구 한 바퀴를 돌아야 한대도 괜찮을 정도로 달았다. 정강이를 확 걷어차줄 셈이었다. 분명 그랬는데…
나는 살며시 그의 팔에 팔짱을 꼈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내 손을 감싸더니 놀라면서 너무 차잖아, 했다. 미안함에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발이 너무 아프긴 했지만 울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를 올려다보며 웃음을 지었다. 연고나 반창고, 편한 슬리퍼도 필요 없었다. 그 순간 내게 더 필요했던 것은 그의 싱그러운 미소 한 번이었다.
그가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살짝 투정을 부리며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래. 출발하지 않은 것도, 도착하지 않은 것도 아니잖아. 다만 조금 늦었을 뿐이니까.
그가 예약해둔 레스토랑은 시간이 지나서 갈 수 없었다. 그는 차갑게 언 나의 손을 주무르며 근처 카페로 데려갔다. 나는 마쉬멜로우를 가득 띄운 코코아를 주문했다. 이 유혹적인 맛을 참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나는 달콤한 것에 완전히 중독돼 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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