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어든 마음은 어떻게든 표가 난다. 부피가 줄고 듬성듬성해져서 이리저리 잘도 찌그러지는 애정은 삶의 무엇 하나 제대로 지탱하지 못하니까. 그래도 사람들은 계속 그 물건을 붙들고 늘어진다. 소중하게 품고 기워 삶에 보탠다. 실제로 도움이 되든 말든. 적어도 퇴근 시간 지하철 출구 앞에서 남자를 기다리고 있는 저 여자는 그랬다.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남자는 오지 않았다. 물론 그는 매번 늦는 유형의 사람은 아니었다. 단지 그날따라 지하철이 고장 나 연착되었을 뿐이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미리 문자를 보내 상황을 알렸다. 여자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남자는 늦장을 부리지도, 열차 운행을 방해하지도, 열차를 고장 내지도 않았다는 걸. 그는 단지 오래된 열차에 탔을 뿐이었다. 하지만 여자는 남자의 그런 선량함마저 지긋지긋했다. 여자는 생각했다. ‘그래, 넌 항상 이유가 있지. 물은 것에는 대답을 않아도 네가 준비해 온 이유만큼은 매번 설명하려 드니까.’

슬슬 코끝이 시려왔다. 여자는 그들이 처음 만난 겨울날을 떠올렸다. 그땐 서로의 얼굴 사이로 하얀 입김이 피어올라도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는 걸, 여자는 아직 기억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그에게서 자신이 너무 희미해졌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여자는 한때 그런 그를 지독히도 미워했다. 오랫동안 그를 사랑하며 동시에 증오했다. 하지만 지금 여자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강렬한 감정들이 으레 그렇듯, 증오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으니까. 대신, 증오는 여자를 놓아주는 대가로 애정을 도려간 것 같았다. 여자는 더 이상 그가 밉지 않았다. 단지 언제든 끝낼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여자에겐 아직 남자가 선명했고 남자는 여자를 위해 나름의 최선을 다했지만, 관계가 늘 그렇듯 그것만으론 충분하지 않았다. 지하철이 연착되던 날, 여자는 그렇게 이별을 실감했다.

지친 기색의 낯선 사람들이 지하철 출구 밖으로 하나둘 걸어 나왔다. 온통 검은 외투를 입고 검은 머리를 한 사람들 사이로 남자가 보였다. 빛 한 줌 새어 나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무리에서 뒷사람에 치이며 인상을 구기는 남자. 제 앞에서 지팡이를 짚고 느리게 걷는 사람이 답답한 듯 한숨을 푹 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그러다가 이내 심호흡을 하며 표정을 누그러뜨리는 저 남자. 여자는 그가 못 견디도록 낯설었다. 남자는 뒤늦게 여자와 눈을 마주쳤고 그의 앞에 멈춰 섰다. 여자는 조용히 말을 건넸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문자 보냈는데? 지하철이 연착돼서…”

“아니, 그게 아니라… 내 말은 그 말이 아니고…”

그리고 둘 사이에는 긴 침묵이 흘렀다.

지하철 문에 기댄 남자의 다리가 덜덜 떨렸다. 남자는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와 책임을 중요시했고, 그래서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 앞에 더 쉽게 무너졌다.

그는 요즘 심각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서른을 앞두고 더 빨리 더 많이 성취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에 늘 조급했다. 매일 시간을 도둑맞는 기분이었다. ‘다른 삶의 가능성들’이 매일 그를 밀치고 지나갔고, 그는 수많은 선택지와 좌절된 확률들 사이에서 휘청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는 주저앉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남자는 처음으로 일기를 쓰고 명상을 하면서까지 평정심을 되찾으려 애썼지만, 마음을 단정하게 하는 일은 하늘의 별 따기와 같았다. 그는 본래 느긋했던 자신의 성격이 그리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결국 사고가 터졌다. 언제부턴가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아예 필름이 끊겨버리곤 했는데, 그날은 버스를 기다리다가 경찰서에서 정신을 차렸다. 남자는 처음엔 경찰에게 자신이 얼마나 반듯하고 성실한 사람인가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곧 자기가 밀쳐 크게 넘어진 노인과 눈이 마주치자 얼굴이 빨개진 채 입을 닫아버렸다. 결국 그는 비싼 합의금을 물기로 하고 연신 고개를 숙이며 경찰서를 나섰다.

그때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여자 친구의 전화였다. 남자는 여자에게 어디까지 솔직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이내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로 했다. 너무 불행해서 나도 모르게 남에게 폭력을 휘둘렀다는 얘기를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그건 너무 비겁하게 들렸다. 남자는 아직 그런 스스로를 인정하거나 완전히 직면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연히 여자에게 이해받고 싶지도 않았다.

진동이 멎었고, 남자는 여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미안, 지금 지하철이 고장이 나서 연착됐네…’

메시지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남자는 생각했다. ‘다음에 또 이러면 어쩌지? 그땐 어디에서 눈을 뜨게 될까? 이러다가 나를 완전히 잃어버리면...’

남자는 여자에게 가기 위해 지하철로 향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가 타려던 열차는 정말로 연착됐다.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가끔 몸은 존재를 앞서간다. 몸이 이미 도착한 곳에 마음이 따라가 뒤늦게 자리를 잡는 육체와 정신의 연착.

그 시차가 느껴질 때면 번번이 사고가 터진다. 내가 망가지면 ‘열차 고장으로 인한 지연’이라는 방송이 나온다. 그리고 어두운 옷을 입고 그와 대비되는 화사한 조끼를 걸친 사람들이 와서 내 몸 구석구석을 고친다. 의사들은 보통 희고 불편한 옷을 입던데, 이들은 비슷한 일을 하면서 더 적절한 옷을 입는다.

정시성은 내 정체성의 핵심이다. 아무리 매일 사람이 미어터지고 소란이 일어도 나는 정해진 계획대로 움직여 왔다. 그런데 요즘은, 그것만으론 충분치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주변 다른 열차들은 하나둘 새 열차로 교체되고, 나를 탄 사람들의 불평이 끊이지 않는다. 냄새가 난다는 둥, 에어컨이 고장 났다는 둥 말들이 많은 걸 보니, 시간에 맞춰 움직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그동안 대체 어떤 일을 해온 걸까? 내가 이제껏 실어 나른 건 뭐였는지 처음으로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다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왜 나에게 온 사람들은 거의 불행해 보이지? 가끔 놀러 가는 아이들이나 깔깔거리는 학생들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어른들은 울상을 하고 있잖아. 나는 내 평생을 바쳐 불행을 실어 날랐을 뿐인 건가? 설마 불행의 책임이 나에게 있는 건 아니겠지? 머리가 복잡했다.

이런, 복잡해진 마음이 고여 있는 동안 몸은 또 습관처럼 움직이고 말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연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