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월호《연착》: 스노우뱅크

54편째 풋소설

2024. 11. 12.

🍏 11월호《연착》: 스노우뱅크

54회 (2024.11.13)

11월호 주제 《연착》

스노우뱅크

영서

8시쯤 눈이 온댔어. 동네 선술집에 나란히 앉아 창밖을 바라보던 해영은 그렇게 말했다. 낡은 나무 테이블과 의자 앞으로, 조개탕과 유부 우동 따위의 메뉴가 적힌 허름한 종이들은 작은 입김에도 이리저리 나부꼈다. 연식이 오래된 가게라 외관은 초라한 데 비해 안은 오히려 아늑하고 따뜻했다. 바깥은 11월 말미의 차가운 풍경으로 가득해 쓸쓸해 보였다. 곧 눈이 온다지. 그래. 해영은 옛날부터 눈을 좋아했지. 얼마 전, 눈을 보고 싶다며 해외여행을 가겠다던 해영의 말은 갑작스럽긴 해도 딱히 이상할 건 없었다. 그런데 나는 눈이 보고 싶다는 말보다는 해외여행을 간다는 말의 숨겨진 저의를 찾아내려 애썼다. 눈 더미를 파헤치듯 해영의 마음을 파헤치고 싶었다. 아무리 봐도 해외여행을 가겠다는 해영의 다짐 같은 말 속에 나와 함께 가고 싶은 마음은 부재했다.

해영이 여행을 떠나기 전 서울에 먼저 함박눈이 내리기를 바랐다. 그게 오늘이기를. 그래서 작은 눈 더미가 곳곳에 쌓인 거리를 해영의 손을 잡고 걸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9시가 넘었는데도 눈은 오지 않았다. 바형 테이블에 안주도 없이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어 온(溫)사케를 한 병 주문했다. 아무래도 오늘 밤엔 안 오려나 봐. 해영이 메마른 창밖의 풍경을 힐끔 보더니 따뜻하게 데워진 사케를 담은 술잔을 손에 쥐었다. 동그란 술잔을 손난로처럼 감싸 쥔 해영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해영은 최근에 피아노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새 손가락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는 생각을 했다. 피아노 학원이며 해외여행이며 갑자기 해영답지 않은 결정을 내리는 모습은 나를 불안하게 했다. 불안해지면 한 가지 생각에 골몰하게 된다. 나는 해영다운 것의 일부인가, 아닌가. 스스로 던진 질문은 너무나 모호했고 늘 답을 내리지 못한 상태로 휴지기를 가질 뿐이었다. 지금 보니 해영의 손가락이 예뻐졌다는 느낌을 받지만, 굳이 말로 꺼내진 않는다. 예쁘다는 말을 해영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해영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게 예쁘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것도. 나는 그게 늘 불편했다. 해영을 예뻐하는 마음은 온전히 내 것인데도 해영은 그걸 거부했다. 자기가 믿지 못하는 건 끝까지 믿지 못한다고, 해영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설령 그게 사랑일지라도.

나는 나를 미워하는 사람의 얼굴을 잘 알고 있다. 미워하는 마음을 일찍 알아채는 능력은 이제껏 살아오면서 자연스레 생겨났다. 상대의 달갑지 않은 마음을 뒤늦게 깨닫는 건 나를 견딜 수 없이 우습게 만들기 마련이므로, 차라리 먼저 알아채고 거리를 두는 편이 나았다. 미워하는 얼굴은 단순히 찡그린 표정 같은 것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것보다는 버거워 보이는 얼굴, 슬픈 얼굴, 입을 꾹 다문 얼굴들과 닮아 있다. 해영은 언젠가 미워하고 싶지 않아서 사랑도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사랑하면 미워지는 게 상대인지 해영 자신을 일컫는 건지는 모르겠다. 다만 따스하게 데워진 사케 잔을 마시지 않고 가만히 쥐고만 있는 지금 해영의 얼굴은 유독 버겁고 슬퍼 보였다.

나는 오늘 밤엔 눈이 내리지 않을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물었다. 눈이 올 때까지는 여기서 술을 더 마실까? 해영은 망설이다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눈이 오지 않는 창밖을 말 없이 바라보았다. 해영은 10월부터 줄곧 눈이 보고 싶다고 말해 왔다. 서울의 매연과 먼지가 섞인 땅 위의 자잘한 눈 자국 같은 거 말고, 허리까지 쌓인 흰 눈 더미를. 삽으로 파헤쳐도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휘몰아쳐 쌓인 눈 더미를 보고 싶다고. 그러나 서울의 좁은 땅 위에는 그런 눈 더미가 자리 잡을 틈이 없다는 게 해영을 속상하게 만드는 듯 했다. 나는 해영이 더는 속상하지 않기를 바랐는데, 눈이 올 거라던 오늘 밤의 하늘은 여전히 깨끗하고 어둡기만 했다.

결국 사케를 다 비우기도 전에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코트를 챙겨 입고 바깥으로 나오자 건조한 겨울밤의 거리가 눈앞을 메웠다. 선술집 입구에서 해영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잠시 가볍게 손을 맞잡았다가 잘 가라는 인사를 했다. 잠깐 닿았던 해영의 손은 차가웠다. 인사 끝에 돌아선 해영의 뒷모습과 함께 떠오른 것은 해영이 내가 없는 어딘가에서 홀로 맞을 함박눈, 허리께까지 쌓인 흰 눈 더미, 피아노를 연습하며 조금씩 달라져 갈 해영의 손가락. 그리고 내 앞에 다가올 수많은 불면의 밤들이었다. 나는 나를 미워하는 사람의 뒷모습을 잘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