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월호《연착》: 여보세요

55편째 풋소설

2024. 11. 15.

🍏 11월호《연착》: 여보세요

55회 (2024.11.16)

11월호 주제 《연착》

여보세요

예

H에게 전화를 걸 수 있었던 건 기차가 연착됐기 때문이었다. 10분. 이 정도면 안부 인사하기 괜찮지 않을까. H에게도 역시 부담스럽지 않은 시간일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용기가 났다.

여보세요? 옆 선로에 올라와 있는 기차들이 내는 굉음과 쩌렁한 안내 방송이 더해져 수화기 너머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들려? 수신 확인을 몇 차례 반복하고 나서야 H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H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반가워 보였다. 어, 잘 지내나 하고.

웬일이래, 전화를 다 하고.

H의 근황. 나의 잔소리. H의 웃음. 잠깐의 정적.

뭐라고 말했어? 아무것도 안 들리길래.

아니야. 아무 말도 안 했어. 덕분에 잘 지내고 있다고. 응. 또 연락할게.

뚝-.

정작 하고 싶은 말을 못했다. 고맙다는 말 같은 거. 낯선 곳에 혼자 놓여 있으니 네가 생각난다는 말. 건강히 다시 만나자는 말.

⁎⁕⁎

Y는 H만 생각하면 눈물이 고였다. 쌀 봉지를 묶을 때, 올리브유에 마늘을 볶을 때, D가 F1 이야기를 꺼낼 때, 샤워하는 게 어색할 때, 그리고 철저히 혼자가 되었을 때. 곁에 아무도 없을 때.

Y가 지내는 이곳은 Y 손으로 선택해서 온 길이었다. 반대로 H는 자신이 가야 할 곳을 끔찍이 싫어했지만, Y는 이곳에서 H 생각을 자주 했다. H를 불러내는 원인이 ‘거처를 향한 의지가 같았기’ 때문은 아닌 모양이었다.

크기가 작아진 H가 Y의 뇌 속에 들어와 언제나 함께하는 기분이었다. 직접 뇌가 되어 상황을 조종하는 대신, 은근하고 끈질기게 머물러 있었다. Y는 그것이 H가 자신에게 건 저주 같다고 생각했다. (혹은 마법?)

규칙도 모르는 곳에 놓여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했다. 시간이 흐를까. 겨울이 올까. 침대에 누워 까만 천장에 끔뻑끔뻑 눈을 뜨고 피워 올리던 생각이었다.

Y는 혼자 보내는 날이 많아졌다. 하루에 몇 마디 하지 않는 날이 더 많았다. 홀로 머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과거를 회상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과거는 사진첩을 헤집고 음성 메모를 뒤집고 다운로드 목록을 꼬집는다. 헤진 필름을 빠르게 감았다가 되감는다. 웃음 소리를 게워 낸다. 냄새가, 향기가, 향취가 떠오른다. 수억 수천 개의 기억은 왜 좋았던 것만 선명하게 남겨둔 채 바래지는 걸까.

기억에서 만난 H가 웃었다가 화냈다가 사라졌다가 작아졌다가 파래진다. 빙글빙글 돌기도 한다. 안쓰러움과 미안함, 또 안쓰러움과 고마움이 슈가 파우더처럼 녹아 있다. 갑자기 슈가파우더라니. Y는 피식, 웃었다가 다시 H에게 ‘슈’로 시작하는 이름을 가진 반려동물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 울적해졌다. (맞아, H는 걔를 끔찍이 사랑했었어)

⁎⁕⁎

H를 쫓아내고 싶진 않았다. H는 그곳을 원하지 않았었으니까. 그래도 거기서 잘 지내고 있으니까. 사실은 진심으로 걱정해 본 적은 없었지만 아무렴 잘 지낸다는 사실은 나를 안심 시켰으니까.

언제 다시 H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여보세요, 하고 몇 번을 더 불러야 H의 전화선에 닿을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수요일 오후 11시다. 나는 아직도 기차에 있는데, H는 이제 곧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