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은 내게 물었다. 네게도 소중한 기억이나 사랑하는 것들을 모아 담아두는 그릇 같은 게 있냐고. 나는 그런 걸 다 담아뒀다가는 언젠가 넘쳐 전부 잃어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처음부터 모아두지 않는다고, 그러는 편이 덜 불안하지 않겠냐고 했다. 안은 편안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럼 나는 넘쳐흐르는 기억들 속을 헤엄칠 거야. 나는 안의 비유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어쩌면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안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벌을 받은 게 아닐까. 안이 나를 세게 끌어안으면 부수어지도록. 손쓸 수도 없이 망가져버리도록.

*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둔 날이었다. 안은 늦은 저녁 연락도 없이 불쑥 집으로 찾아왔다. 사랑하는 연인 사이일지라도 각자만의 생활은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안은 몇 년째 들은 체 만 체 했다. 나는 얼굴을 찡그렸지만 안은 아무런 타격도 없는지 배시시 웃으며 품으로 파고들었다.

 밖에 눈 와, 그새 많이 쌓였어.

 안이 입을 열자 옅은 술 냄새가 났다. 나는 그제야 날리는 눈발을 보았다. 바람이 꽤 세게 부는 모양이었다. 안의 외투엔 아직 한기가 남아있었다. 그러나 안은 신발도 벗지 않고 계속 나를 안고만 있었다. 현관등이 꺼진 이후로도 들어올 생각은 없어 보였다.

 눈사람 만들자.

 안이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밤 열한 시였다. 내일은 안도, 나도 출근을 해야 했다. 아직 집안일을 다 마치지 못했고, 다 끝내고 나면 오래간만에 여유롭게 쉬고 싶기도 했다. 게다가 이 날씨에 나가 눈사람을 만들었다가는 감기에 걸려 고생할 게 뻔했다. 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시간이 늦었어. 다음에 만들자.

 …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평소의 안답지 않았다. 평상시대로라면 내가 포기하고 따라나설 때까지 팔을 붙잡고 늘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안은 알겠어, 짧게 대답하고는 미련 없이 돌아 나갔다. 불 꺼진 현관등 아래에서 나는 안이 있던 곳에 남겨진 발자국만 쳐다봤다.

 혹시나 하고 내다본 창밖으로 안이 부지런히 눈을 끌어다 모으는 모습이 보였지만 나는 조용히 커튼을 치고 남은 빨래를 마저 갰다.

 쓰레기를 버리려고 집 밖으로 나가자 주차장 한구석에 나란히 서있는 눈사람 두 개가 보였다. 안의 작품인 것 같았다. 표면이 매끄럽고 깨끗한 것이 공들여 만든 티가 났다. 나는 눈사람의 둥근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내가 너무했나? 혼자 만드니 더 춥고 심심했겠지? 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소박한 소원조차 이루어주지 못하나? 이런 내게 그 애를 사랑할 자격이 있기는 한가? 그런데 또 생각해 보면, 안이 너무하지 않나? 야밤에 무작정 찾아와 눈사람을 만들자니. 친절히 타일렀음에도 보란 듯 혼자 눈사람을 만들어 죄책감을 느끼게 했다. 그러니 그 애도 잘못이 있는 거 아닌가?

 안 옆에서 나는 언제나 나쁜 사람이 됐다. 그 애가 순수한 얼굴로 자신의 모든 걸 내어주며 사랑을 고백할 때면 나는 늘 내가 주는 사랑의 부족함을 실감했다. 사랑을 보답하지 못한다는 것만으로 늘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늘 자기보다는 내가 먼저인 안과는 달리, 때때로 자신을 위한 선택도 하던 나였으니까. 그 순간마다 안에게 크나큰 상처를 안겨주는 기분을 느꼈고, 스스로가 끔찍하게 싫어지기까지 했다.

 나는 눈이 쌓인 바닥을 향해 발을 굴렀다. 아무런 의도도 없는, 할 수만 있다면 나를 향해 차고 싶은 발길질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눈사람의 머리는 속수무책으로 굴러떨어져 깨어지고 말았다.

 그러지 말지….

 돌아간 줄 알았던 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북받치는 울음을 참으려 하는 안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안은 떠났고, 나는 혼자 남았다.

*

 내 기억은 거기까지다. 그날 이후로 안을 보지 못했고, 꽤 오래 어지럼증을 앓았고, 유독 잠을 많이 잤다는 것만 기억난다. 눈을 떠보니 사방이 하얀색이었다. 온몸이 움직이지 않았고 얼음이라도 된 듯이 찼다. 팔이 있어야 할 곳에는 볼품없이 얇은 나뭇가지가 꽂혀있었고, 몸으로 인지되는 부분엔 새하얀 눈덩이가 있었다. 영락없는 눈사람의 형태였다. 나는 내가 드디어 미쳤는가 보다, 생각했다. 꿈인가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나 생생한 것이 꿈일 리 없었다. 혼란 끝에 떠오른 마지막 장면은 나의 죽음이었다. 나는 죽었다. 그리고 하필이면 눈사람에 빙의되었다.

 눈사람으로서의 생활은 따분했다. 서있는 것밖에는 할 수가 없어 시간이 흐른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시간은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 가득 고여 내게로까지 흘러오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랬기에 기온이 올라 몸의 일부가 녹아내리기 시작할 때 나는 차라리 감격스러웠다. 그날 밤 안이 혼자서 느꼈을 추위를 매분 매초 감각하는 것은 너무나 버거웠기 때문에, 사라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어김없이 겨울이 오면 나의 육체는 하늘에서 산산조각 난 채로 땅에 내려앉았고 눈사람의 형태를 갖추었을 때 의식은 깨어났다.

 그리고 어느 겨울, 안을 보게 되었다. 나는 눈사람이 되었기에 안을 부를 수 없었고 안도 당연히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안은 눈사람의 모습을 한 내 정수리 부근을 쓰다듬고 자리를 떴다. 그다음부터는 눈을 뜰 때마다 내 앞에 안이 있었다. 나는 돌멩이 눈으로, 병뚜껑 눈으로, 나뭇잎 눈으로 안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나는 매해 겨울마다 안이 만든 눈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듯했다. 안은 여전히 혼자서 눈사람을 만들었고 그 점이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그래도 다행이었다. 이렇게라도 안의 얼굴을 볼 수 있어서. 안의 옆에 남아있을 수 있어서.

 하루는 안이 스러져가는 내 옆에 앉아 큰 한숨을 뱉으며 말했다.

 이제 그만할래. 널 만들면 자꾸 그 사람이 생각나.

 나는 말하고 싶었다. 안, 부탁이야. 염치없지만 나를 모으고, 뭉쳐줘. 데구루루 굴려질 때는 조금 어지럽겠지. 그래도 괜찮아. 그래야 너를 빨리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주먹만 한 크기도 좋고, 울퉁불퉁하고 더러운 모습이라도 좋아. 나를 만들어 널 몇 초라도 볼 수 있게만 해줘…

 하지만 들릴 리 없었고 설령 기적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런 부탁이 이기적인 것을 알기에, 간절한 마음을 담아 마지막 부탁을 했다. 안, 내가 녹고 있어. 마지막으로 나를 안아줘. 기쁘게도 안은 나를 안았다.

 나는 안에게 닿지 않을 고백을 하며 서서히 녹았다. 안, 너를 잃을까 두려워 숨겨놨던 마음들을 꺼내 그릇에 담으니 한가득이었어. 나는 넘쳐흐르는 그 속을 헤엄칠 거야. 그건 영원한 헤엄이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