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아침이었다. 다른 영혼이 내 안에 들어앉아 똬리를 튼 것처럼 속이 부대끼고 몸이 낯설었다. 한 번도 잠에 든 적 없는 것처럼 또렷한 채 깨어났다. 꿈엔 처음 보는 얼굴들이 줄지어 나왔다.

지난밤의 이야기를 좀 더 해야겠다. 꿈속에서 처음 보는 여자 한 명이 내 친구인 양 굴었다. 나는 자꾸만 엉겨 붙는 낯선 그를 뒤로한 채, 계속 공포 유튜브 영상을 클릭했다. 난 한 번도 그런 걸 원한 적 없었다. 썸네일이 불쾌하고 무서워서 제 멋대로 움직이는 엄지손가락과 내 시야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뿐이었다.

나는 곧 어느 워터파크의 거대한 미끄럼틀 위에서 눈을 떴다. 미끄럼틀 위에서 본 풍경은 기이하게도 익숙했다. 꿈속의 나는 내가 이전에도 그곳에 와봤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현실엔 존재하지 않지만, 꿈속에선 여러 번 가본 장소가 있다는 걸 생각하니 오싹했다. 지나가는 길엔 임신한 여자 둘이 워터파크 개방 샤워장에서 거품 칠을 하고 목욕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낯선 친구의 손에 이끌려 어두운 오락실로 향했다. 헌팅을 목적으로 하는 곳이었다. 거기서 나는 곰처럼 생긴 괴물과 처음 보는 남자아이와 중년 남성들을 마주쳤다. 나는 나도 모르는 새 그들 모두에게 친절히 대했고, 기분이 개같았다. 그곳에서 빠져나와 모르는 건물을 두리번거리다가, 잠에서 깼다.

눈을 뜬 나는 방바닥에 반듯이 앉아 있었다. 언제 침대에서 나왔는지, 영문을 알기도 전에 나는 또 책장 앞에 서 있었다. 처음 보는 제목의 시집이 내 방, 내 책장에 꽂혀 있었다. 멸망하는 세계에 관한 시집이었다. 창밖엔 일주일째 원인 모를 ‘삐-삐-‘ 소리가 나고, 오수 배출 시스템이 고장 나 세면대며 변기 물이 내려가질 않고, 하수도관 공사 때문에 동네 땅이 모조리 뒤집어져 사방으로 어수선했다.

내가 발 딛고 사는 땅은 사실 땅이 아니고 복잡한 사회 체제의 뚜껑이라는 걸 눈으로 봤다. 나는 창 안에 있는 것 같기도, 창밖에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사실 벽은 종잇장만큼이나 연약하기 때문에 별 차이는 없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한시도 쉬지 않고 흙먼지와 새 아스팔트를 까는 냄새가 감각을 찔렀다. 땅을 뚫는 진동에 등골이 덜덜 울렸다.

나는 떨리는 몸과 경계가 흐려진 정신을 붙들고 또 다른 하루를 시작해야 했다. 씻고 머리를 말리는 동안에도 꿈에서 본 낯선 얼굴들이 중간중간 튀어나와 망막을 어지럽혔다. 아직도 멀리서 워터파크의 혼란한 물소리가 들렸다. 아무라도 나를 끌어다가 현실의 땅에 붙여 주길 간절히 바랐지만, 내겐 땅도 사람도 없었다. 결국 난 홀로 붕 떠 세계에서 유리된 채로 오늘을 살았다.

정말이지, [ ]이나 [ ], [ ]나 [ ]의 도움이 없인 하루도 버틸 수가 없었다.

*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다. 연말이란 개념은 곱씹을수록 이상하다.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넘어갈 때, 아무런 정지나 여백이 없다는 걸 생각하면 어쩐지 속은 기분이 든다. 무언가 ‘중요한 것’이 끝나고 새로운 기회가 주어지는 척, 온 세상이 요란법석을 떨었으면서, 막상 부푼 기대에서 삭막한 일상으로의 추락은 개개인이 알아서 감당하라니. 완전히 무책임하고 더럽게 이기적이다. 매번 연말이 되면 딱히 특별한 것이 없는데도 특별하고 싶은 마음과 눈에 띄는 모든 이들을 바닥까지 끌어내리거나 아예 지독하게 사랑해 버리고 싶은 충동으로 가득해졌다. 감정으로 학습된 의례와 그에 대한 저항 심리의 끔찍한 콜라보레이션, 그리고 추위까지. 최악의 시간이 아닐 수 없다.

엄마네 집 거실엔 12월마다 큰 트리가 세워졌다. 이번에도 트리는 있고 엄마는 없었다. 미완성의 트리 옆엔 오래된 오너먼트들이 상자 가득 들어있었다. 나는 묵묵히, 티비에 그냥 틀어 둔 영화에서 백인들이 차를 부수고 총을 쏴대는 소리에 맞춰 트리를 마저 장식했다. 다른 오너먼트를 꾸역꾸역 다 걸고, 마지막으로 커다란 별 모양의 트리 탑만 남았다. 비슷비슷한 걸이용 장식들 사이에 홀로 다르게 생긴 조각, 나는 어린 시절에 그 별을 가장 좋아했다. 까슬까슬하게 반짝이가 발린 플라스틱별을 만지면 손에 가루가 묻어나오는 게 싫으면서 좋았다. 사포 같은 겉면으로 손등 위를 살살 긁자, 반짝이가 묻어나왔다. 두 번 세 번 반복하면, 조금만 더 힘을 세게 주면 상처가 날 것이다. 붉고 반짝거리는 상처가.

그 길로 티비를 끄고 엄마의 집에서 나왔다. 다신 돌아가기 싫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별도 훔쳤다. 하지만, 나는 얼마 가지 못하고 어느 상가 앞 도로 경계석에 주저앉았다. 손에 들고 있던 별을 아스팔트 바닥에 직 그으니 반짝이는 흐릿한 줄이 생겼다. 나는 그걸로 뭔갈 끄적여 보려다가 금방 포기하고 별은 수풀에 던져버렸다. 던져진 별은 나뭇가지에 걸친 채로 여전히 반짝였다. 앙상한 수풀이 돌연 트리 같이 보였다. 그게 또 나름 귀여워서 기분이 확 상했다.

매연과 먼지를 먹으며 거기 한참 앉아 있는 동안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다. 나는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 눈 한 점 없는 메마른 겨울날, 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집에 매번 트리는 왜 있는지. 장식은 또 왜 매다는지. 사람들이 의미를 부여했을 뿐, 사실 쓸모 없지 않나? 모든 것이 헛되다고 생각했다. 의미와 진정성은 늘 그것을 갈망하는 사람의 손에만 잡히는 것 같았다. 나처럼 모든 판단을 유보하고 뿌리내리지 못한 사람 위에는 잠시도 머무르지 않았다. 내가 반중력의 존재라도 되는 양, 그것들은 그렇게 매번 요리조리 가벼이도 나를 비껴갔다.

집은 거기에 그대로 있었다. 달라진 건 내가 버리고 온 별뿐이었다. 그동안 거실을 지킨 트리는 돌아온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간 받아온 애정이 혹시 부족했느냐고. 대답은 하지 못했다. 나는 늘, 가능한 한 사랑으로부터 초연해지고 싶었다.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기 위해 매 순간 사랑에 대해 생각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사랑을 흉내 내기 바빴다. 트리에 장식을 달고 전구를 켜면서. “빨리 와”라고 문자를 보내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실낱같은 연결과 진부한 다정함이라고 말은 잘도 했다. 한 번도 그걸 온전히 믿어본 적 없으면서도 계속 그렇게 했다.

그날 홀로 저녁을 먹는 내내, 바깥에 버린 별이 마음에 걸렸다. 꿈속에서 느낀 고립감과 현실에서 느낀 고립감이 동시에 나를 덮쳤다. 도처에 사랑이 있었지만, 궁지에 몰린 내게 닿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