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월호《성탄 나무 소설 걸렸네》: 그대들의 다락방

60편째 풋소설

2024. 12. 20.

60회 (2024.12.21)

12월호 주제 《성탄 나무 소설 걸렸네》

그대들의 다락방

예림

서린이 눈을 떴을 때 서린의 눈앞에 놓인 건 나무로 된 문이었다. 잔뜩 녹슨 손잡이가 달려있는 덕에 문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사위에는 적막이 내려앉아 있었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혹은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해 겪는 몽롱한 상태인지 분간하기 힘든 상태였다. 주변을 곁눈질로 조심스레 훔쳐내던 서린은 저도 모르게 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비스듬한 천장에 나 있는 창문으로 새벽빛이 들어서고 있었다. 흩날리는 먼지. 뿌연 시야.

서린이 서 있는 공간은 나무로 지어진 채 오랜 시간 동안 존재한 듯싶었다. 아마 십 년보다는 많게, 백 년보다는 적게, 혹은 서린의 나이 정도?

희뿌연 시야 속 어렴풋이 반짝이는 무언가가 서린의 눈길을 끌었다. 찬란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가 시간에 치여 원초의 빛을 잃은 듯했다. 다가가 자세히 보니 그것들은 선물 상자였다. 붉은색, 금색, 초록색, 은색과 더불어 형형색색의 무늬로 휘감긴 선물 상자들.

선물 상자 더미는 이상한 기운으로 서린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처음에 문 손잡이를 ㅡ저도 모르게ㅡ 잡아 당겼던 것처럼 상자 하나의 뚜껑 위로 손을 올렸다. 빨간 포장지에 노란색 별이 반복적으로 그려진 상자였다.

상자를 여는 순간 새하얀 빛이 새어 나왔다. 빛이 얼마나 강력한지 서린은 잠시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빛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는 교복을 입은 아이가 서 있었는데, 서린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옷이었기 때문이다. 서린이 어렸을 적 다녔던 중학교의 교복이었다. 그러나 서린을 보다 더 놀라게 한 것은 아이의 정체였다.

민서.

민서였다. 서린의 중학교 교복을 입고 서 있는 아이. 두 팔로 교과서와 노트, 필통을 감싸 쥔 채 얌전히 서 있는 아이. 옅게 미소를 짓는다. 장난기가 얼굴에 가득하다.

주마등처럼 지난날이 스쳤다. 다른 고등학교를 가게 되어 서먹해진 뒤로 가장 보고 싶어 했던 친구가 바로 민서였기 때문이다. 쉬는 시간이면 함께 매점에 가거나 등하교를 같이하거나, 어느 학기에는 반장 부반장을 함께 맡기도 했었다. 언제나 죽이 척척 맞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서로를 크게 미워하지는 않았다. 다만 철없는 시기답게 싸우고 화해하기를 하도 많이 반복한 탓에 우리가 어떤 사이로 마무리되었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민서는 성인이 된 후에도 종종 서린의 꿈에 나와 얼굴을 비추었다. 찝찝한 반가움을 안고 서린은 늘 민서의 이름을 불렀다.

“민서야.”

꿈속의 민서는 서린을 돌아보지 않았고, 꿈속의 민서에게 서린은 늘 종종거렸다. 꿈에서 깨고 나면 민서에게 자신이 아마 몹쓸 짓을 한 것 같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잠에서 깨기도 한다. 그때의 서린을 지키기 위해 발동한 미숙하고 못된 마음들이 민서를 찌른 것 같다. 그래서 민서가 자꾸만 나와 괴롭히나보다. 그때마다 서린은 자책하며 생각했다. 안아주고 싶다.

마치 민서의 꿈을 꾸었던 그날 밤으로 돌아간 것처럼 서린은 가슴이 뛰었다. 상자에서 나온 민서가 서린을 향해 웃고 있었다. 예쁜 반달 눈웃음이 그때와 너무 똑같아서 괴로웠다. 서린은 이번에도 ㅡ저도 모르게ㅡ 상자의 뚜껑을 닫아버렸다. 모든 것이 사라졌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요했다.

심장은 처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서린은 황급히 그 옆에 있던 상자 뚜껑을 들췄다. 새하얀 연기가 사라지자 이번에 나타난 것은 어떤 어른이었는데 역시 서린이 잘 아는 인물이었다.

선생님.

서린의 오 학년 담임선생님이었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분간하기 어려웠던 어린 날에, 담임 선생님은 유독 서린에게 다정했다. 글씨를 잘 쓴다고 칭찬했다. 심부름을 부탁하고 특별 청소를 시켰다. 나머지 상담을 했고, 선생님 앞에서 여러 차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종종 선생님의 근황을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선생님은 예쁘장한 어린아이를 안고 브이를 그리고 있었다. 아마 ㅡ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분간하기 어려웠던ㅡ어린 날에 보았다면 두 사람이 닮았는지 아닌지 분간하기 어려웠겠지만, ㅡ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어느 정도는 분간이 가능한ㅡ 지금의 서린에게는 두 사람이 피가 섞인 관계라는 걸 높은 확률로 확신할 수 있었다.

눈앞의 선생님은 그때처럼 청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검은색 패딩을 입은 채 서 계셨다. 급식실로 가나요? 하고 서린은 묻고 싶었다. 그리고 급식실로 갔으면 좋겠다고, 6번 자리에 서서, 한 줄로 나란히 선생님을 따라 급식실로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주황색 칠이 칠해진 복도, 금색 띠로 나누어진 돌 색 바닥, 그 위를 쉴 새 없이 스치는 작은 발자국들.

서린은 선생님이 나타났던 상자 뚜껑을 던지듯 닫아버렸다. 그러지 않으면 점점 가쁘게 차 오는 숨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어 나머지 상자를 열자, 젊은 날의 할아버지가, 기타를 잘 치던 대학교 선배가, 가끔 무료 커피를 내어주던 집 앞 카페 사장님이 차례로 나타났다. 전부 지금은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저들의 모습과 함께 가지고 온 무형의 에너지가 서린을 괴롭게 했다. 가슴이 사무치게 저려오는 탓에 그저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더 이상 열어볼 상자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서린은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이 문을 열고 나가면 언제 또다시 다락방에 초대될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시 이 문을 여는 날이 오면 늘어난 상자들이 서린을 맞이하리라는 것도, 그 안의 사람들을 마주하기가 더욱 겁나리라는 것도 잘 안다.

서린은 손을 뻗어 손잡이를 찾는다. 눈앞에 뿌연 먼지가 가득해서 손잡이를 쥐기가 쉽지 않다. 몸에 점점 힘이 빠진다. 제멋대로 들썩이는 어깨를 부단히 누르며 더듬거린다. 손잡이가 잡혔다. 서서히 돌린다. 서린의 등 뒤로 목소리가 들린다.

서린아.

돌아보지 않는다. 서린은 마지막 힘을 짜내 몸을 다락방 밖으로 내친다. 양팔이, 양손이, 열 손가락이, 두 무릎이, 열 발톱이, 머리카락이 와르르 부서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