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부터 발끝까지 한껏 빼입은 은설의 두 눈은 열의로 가득 차 있다. 찰랑거리는 머리칼에는 넘실대는 기대감이, 핸드백을 쥔 손에는 감출 수 없는 간절함이 묻어난다. 약속한 시간보다 20분이나 일찍 도착한 은설은 화장실에 들렀다. 거울과 마주 서서 어른스러우면서도 능숙해 보이는 웃음을 짓고, 동시에 순진한 느낌이 배어 나오도록 귀엽게 광대를 올려 보였다. 오늘을 위해 혼자서 몇 번이고 연습했던 미소지만 긴장한 탓인지 바들거리는 입꼬리가 은설은 야속하기만 했다.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두 번 하고는 자신의 뺨을 대여섯 번 가볍게 쳤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만 했다. 올해에는 꼭, 열렬한 사랑을 하고 말리라는 다짐을 했기 때문이다.

*

 은설은 로맨스 소설과 영화를 달고 살면서 자신과 딱 맞는 상대를 운명처럼 만나기를 바라왔다. 외적인 모습에 강한 끌림을 느끼는 것은 기본, 관심 있는 분야가 비슷해 대화는 끊김 없이 흘러가다 못해 오랜 친구처럼 죽이 척척 맞고, ‘이 사람이다’ 하는 강력한 직감이 꽂히는 사랑.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런 사랑을 꿈꾸지 않는가. 다만 그녀에게 문제가 있다면 스물 후반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도 그런 운명적 만남이 모두에게 주어지는 공평한 기회라고 믿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그녀는 소위 말하는 모태솔로. 태어나 단 한 번도 진정한 사랑을 경험해 보지 못한 불쌍한 여자다.

 발랄한 단발머리에 아담한 키. 사근사근한 목소리에 배려 깊은 마음까지. 은설도 하나하나 뜯어보면 괜찮은 구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모두의 호감을 살법한 상냥한 말투라든지, 상대를 안달 나게 하는 매력 같은 것은 확실히 부족한 타입이었다. 이런 자신의 현실에 무력감을 느낄 때면 은설은 로맨스 영화를 봤다. 그녀가 챙겨보는 로맨스 영화 속 여주인공들은 모두 그녀와 닮아있었다. 평범하고, 어딘가 모난 구석도 있고, 그리 눈에 띄지도 않는 그녀들이 고난 끝에 사랑을 이루는 모습을 감상하고 나면 은설의 덧없는 기대감도 부풀고는 했다. 그러나 그녀가 간과한 것이 한 가지 있었다. 평범한 인물로 묘사되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외모를 갖추고 있다는 것. (이런 점에서 보았을 때 로맨스는 일어날 수 없는 판타지가 아니라 극히 현실적인 장르다.) 하지만 은설의 외모는 객관적인 시선에서 봤을 때 딱 평균이다. 가만히 손 놓고 있어도 멀끔한 남자들이 줄을 설 정도의 미모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녀에게 영화 속에서나 나오는 완벽한 남자와의 운명적인 만남이 저절로 찾아오지 않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그녀를 공상의 세계에서 끌어내 현실을 직시하도록 만든 데에는 친구 A의 도움이 있었다. A는 학창 시절부터 쉬지 않고 연애를 해왔다. 애교 섞인 말투와 웃으면서 태어났다고 해도 믿을 만큼 자연스러운 미소를 얼굴에 띤 A를 보며 은설은 생각했다. 내가 남자라도 사랑할 만하다고. 솔직히 은설은 A가 왜 자신과 어울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정도 결국은 사랑이란 것과 마찬가지로 서로에게 끌림을 느끼고, 애정을 쏟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으니까. 사랑을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엉성한 자신과 그 모든 것이 어색하지 않은 A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하루는 A와 마주 앉아 밥을 먹다가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인 채로 물었다.

 “너는 나를 왜 만나?”

 그러자 A는 황당한 얼굴로 폭소를 터뜨렸다. A는 네가 내 여친이냐며 징그럽다는 듯 질색을 했지만, 이내 진지하게 답을 했다.

 “네가 좋으니까. 너는 좋은 사람이니까.”

 좋은 사람이라. 은설은 한쪽으로 기울어지려는 자신의 고개를 의식적으로 들어 올려야 했다.

 A는 그날 은설을 앉혀두고 거의 교육을 시켰다. ‘네 눈앞에 모든 게 완벽한 운명의 남자가 뚝하고 떨어지는 일은 절대, 절대로 안 일어나.’ 장장 세 시간에 달하는 훈계를 듣고 나서야 은설은 자신의 지난날들이 조금씩 후회되기 시작했다. 갖가지 핑계를 대며 시작조차 못해보고 끝난 인연들과 상처받을까 두려워 혼자서 끙끙 앓았던 시간들이 떠올랐고, 다시 그 일들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며칠 간의 고민 끝에 은설은 자신을 비롯한 다수의 모태솔로가 강력하게 주장하는 ‘자연스러운 만남 추구’에 대한 신념을 버리고, A에게 소개를 부탁했다.

*

 은설은 테이블 아래로 다리를 달달 떨어대며 A가 했던 충고를 되새겼다. 강렬하고 폭발적인 끌림을 기대하지 말 것. 절대 한 번의 만남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 것. 다시 한번 말하지만, 로맨스 영화와 소설 같은 환상의 세계에서 제발 좀 빠져나올 것.

 “처음 뵙겠습니다.”

 이윽고 남자가 왔다. 남자는 정중하면서도 딱딱하지 않은 첫인사를 건네며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그에게 운명적으로 끌리지는 않았지만 대화를 나눌수록 점차 호감이 생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삶을 대하는 태도는 신선하고 흥미로웠으며, 시간을 내어 즐기는 취미가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비록 좋아하는 가수가 같지는 않았으나 즐겨 듣는 음악이 겹쳤고, 영화 취향이 비슷한 탓에 대화 소재가 떨어지지 않았다. 남자는 여유로운 태도로 말을 잇는 듯하다가도 쑥스러운지 한 번씩 시선을 떨구곤 했다. 은설은 그 모습도 꽤나 귀엽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카페에 이어 함께 저녁을 먹고, 술집으로 자리를 옮겨 긴 시간 대화도 나눴다. 설렘과 호기심으로 가득한 시간이었다. 웃음도 끊이지 않았다. 은설은 그의 외모와 자세, 목소리, 성격과 태도, 가치관까지 전부 좋았다. 그렇게 찾아 헤매던 운명의 남자를 만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만 그가 입고 온 늘어난 목티. 그것 하나가 이상하게 걸렸다. 그와의 미래를 상상하는 와중에도 다 늘어나 흐물거리는 목티가 등장해 자꾸만 훼방을 놓았다. 상상이 거기서 그치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가보지도 못한 남자의 방을 그려내고는 그의 옷장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관리되지 않은 옷가지들이 잔뜩 쌓여있다. 보풀이 일어난 니트, 구멍 뚫린 양말, 퀴퀴한 냄새가 밴 바지, 그리고 그 늘어난 목티. 그녀는 터무니없는 공상 따위 그만두자며 마구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상상 속 그녀는 이미 남자의 품에 안겨버린 후였고, 올려다본 그의 콧구멍에서 미처 정리하지 못한 코털을 무더기로 마주하고 말았다.

 은설은 A에게 문자를 남겼다. ‘신경 써줬는데 미안해. 나랑은 안 맞는 것 같아.’

 집에 도착한 은설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의 앞니 한가운데에 수백 번 연습했던 미소가 무색할 만큼 새빨간 틴트 자국이 묻어있었다. 언제 묻은 거지? 술집에서 남자가 자리를 비운 틈에 재빨리 화장을 고쳤던 그때? 식사를 마치고 난 후 들른 화장실에서? 아니면 남자가 도착하기 전 카페에서 급하게 입술을 덧발랐던 게 문제였나? 그녀는 한참 그 자국을 응시하다가 깊은 한숨을 뱉었다. 그러자 텁텁한 입 냄새가 번졌다. 아. 그도 맡았으려나. 분명 그랬겠지. 더는 생각하기가 싫었다. 공들인 화장을 지우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은설은 널브러진 옷가지를 대충 제쳐두고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천장이 빙글빙글 돌았다. ‘너는 좋은 사람이니까.’ A의 말이 떠올랐다. 과연 그럴까. 내 방은 더럽고, 나는 후줄근하고, 매일 바보 같은 핑계를 대며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을 미루곤 해. 또 나는 자주 누군가의 다정함을 질투하고, 참 쉽게도 사람을 미워하고, 좁디 좁은 마음은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은 욕심으로 가득해. 또 말하자면 끝도 없을, 수많은 빈약한 부분들. 넌 이런 내 모습을 모르잖아.

 그녀는 다 늘어난 자신의 츄리닝 바지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꾀죄죄한 모습까지도, 빈틈까지도 사랑하는 것은 도저히 못하겠어. 그런 건 정말 못하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