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현은 며칠 전부터 파워에이드를 마시기 시작했다고 했다. 설탕이 들어간 음료는 생전 입에도 대지 않던 애가 웬일이래. 혼잣말처럼 변화의 원인을 물으면 현은 이렇게 대답했다.

—차갑고 달콤한 물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 들어가면 온몸이 차가워 지는데, 그냥 그 느낌이 좋아. 막 새롭게 다 시작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래.

 현은 대답을 하면서 ‘온몸이 차가워지는’ 묘사를 했다. 두 팔로 몸을 감싸안고 이를 부딪쳤다. 그리고선 웃음을 터뜨리길래 내가 따라 웃으니 우리 둘이 마주 보고 웃는 장면이 되었다. 원하든 원치 않든 갑자기 변화하게 되는 때가 있지. 현의 말에 수긍하면서 현의 손에 들린 파워에이드를 바라봤다. 투명한 페트병에 담긴 액체가 빛을 받아 푸르게 빛났다. 빛을 따라 고개를 들어보니 창밖으로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햇살을 내뿜는 하늘이 유독 파랬다.

— 근데 너도 이런 이온 음료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마시면 기분 전환되니까 오는 길에 네 것도 샀어. 하나 두고 가도 되지?

— 응, 놔두면 언젠간 마시겠지. 고마워.

 성의에 답하는 마음으로 최대한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금 만드는 근육 움직임이 밝은 미소로 보이길 바라며.

2

— 가서도 내 생각 해야 해.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있는 현에게 다가가 말했다.

 현은 호주로 간다고 했다. 더 넓은 세상을 직접 경험해보고 싶다고 말할 때 현은 반짝였다. 과연 곧장 학원을 등록해 한 달 만에 어학 시험을 치르고, 각종 서류를 바쁘게 준비하기 시작했다.

 현은 가졌지만 나는 가지지 못한 수많은 면모 중 하나였다. 천진한 어린아이 같다가도 목표가 생기면 진중하게 나아가는 모습. 나는 어린아이 같지도 않으면서 목표마저 없다. 악의 없이 돌아다니는 질문은 입 밖으로 나올 생각을 않는다. 너는 어떻게 아무런 걸림돌이 없는 것처럼 의연하니. 진짜로 걸림돌 같은 건 네 인생에 없는 거야?

— 당연하지. 매일 연락할게. 보고 싶을 거야.

 현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우리의 몸이 닿으면서 생긴 온기에 하마터면 눈물을 쏟을 뻔했다. 현을 당황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속으로 ’매일 연락하는 건 불가능하지’, 하고 생각했다.

3

 현이 손을 흔들며 문밖으로 사라지고 나니 철저하게 혼자가 되었다. 혼자가 되게 해달라고 그토록 빌었었는데. 바보. 간절히 바라던 것을 이루었다고 해서 소망이 그대로 현실이 되란 법은 없어. 적막한 공간에 흐르는 공기의 냄새를 맡았다. 양쪽 소매를 코에 가져다 댔다. 언제부터인지 나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퀘퀘한 냄새가 사라지지 않는다.

4

 휴대폰을 손에 쥐고 화장실로 향했다. 어느 순간부터 휴대폰을 항시 곁에 두어야만 마음이 편했다. 잘못된 습관인 줄 알면서도 바로 고치려는 노력은 않는다. 칫솔질을 하려는데 띵. 휴대폰 화면이 켜지며 문자 메시지가 왔음을 알렸다.

— 바쁘니? 다시 전화해 주기로 했잖아. 지금 급해.

화면을 응시하는 동안 띵. 하고 한번 더 메시지가 도착했다.

— 정말로 미안해. 이번이 마지막이야. 네 말대로 다신 안 나타날게.

띵. 하고 한 번 더.

— 그래도 가족이잖아. 알지?

5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뉴스 속에서 본 전문가는 양치할 때 최소 여덟 번을 헹굴 것을 강조했었다. 그 장면을 떠올리며 손을 동그랗게 말아 입안으로 수차례 물을 집어넣었다가 뱉어내길 반복했다. 의외로 턱을 오물거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거울 속에는 늘어진 목티를 입은 사람이 하나 서 있었다. 거울 속 사람은 대뜸 두 팔로 몸을 감싸안다가 이를 드러내 부딪쳤다. 얼굴 근육을 꿈틀거렸다. 이내 꿈틀거림을 멈추더니 거울 밖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는데, 다시 나타났을 때는 파워에이드를 손에 쥔 채였다.

6

 — 막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래.

 현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현아, 나도 할 수 있을까?

 오른손으로 파워에이드 뚜껑을 돌렸다.

 나도 시작할 수 있을까?

 뚜껑이 열리자 음료를 응시하던 눈이 파랗게 물들었다. 파란 눈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런 운명이 못 돼.

 그 사람은 자신의 머리 위로 푸른 음료를 쏟아부었다. 음료는 울컥거리면서 페트병 입구를 통과했다. 그 초췌하고 지저분한 얼굴 아래로. 하얀 목티가 파랗게 물들고 있었다. 차가운 기운이 몸을 감싸면서 체온은 급격하게 떨어지고, 새큼한 단 냄새는 코를 찔렀다.

 그때 진동을 동반한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늘어진 목티가 파-하고 숨을 내뱉더니 창가로 달려갔다. 고개를 들어 창밖을 올려다보았다. 고개를 떨구어 파래진 목티를 내려다보았다.

 색깔이 똑같이 푸르렀다. 연거푸 고개를 들썩여 같은 색임을 확인하고 나자, 그제야 웃음이 쏟아졌다.

 아니, 울음인 것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