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연은 이제 패턴을 파악하고 적응하기 시작했다. 월요일, 목요일, 주말은 원래대로 서른 살. 화, 수, 금은 열여섯으로 돌아간다. 예외가 발생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랬다. 대략 4년 전 즈음부터 다연은 간헐적 회춘 현상을 겪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열여섯 살 때처럼 체구가 작아지고 피부가 뽀얗게 변했던 날엔, 다연은 꿈을 꾸고 있는 줄만 알았다. 아니면 시간 여행을 했다거나. 다연이 발을 디디고 있는 온 세상은 그대론데 혼자만 시간을 거슬러 어려진 거였음을 깨달았을 때, 다연은 도망치려 했다. 고작 열여섯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광막하고도 험악한 현실 속에서. 실은 어른 다연에게도 현실은 언제나 공포였다. 그래도 열여섯의 몸으로는 도망이 왠지 더 쉬울 것만 같았다.

 첫 회춘 현상의 발발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 다연은 생활에 조금은 익숙해졌다. 직장을 그만둔 뒤 수시로 나이가 바뀌어도 큰 문제 없는 프리랜서로 이직했고, 그 와중에 틈틈이 연애도 하며 평범한 서른의 여성 같은 삶을 살았다. 열여섯의 다연일 때에는 동네 놀이터에서 병아리 떼 같은 아이들 무리의 사이를 꿰차고 한 시간씩 그네를 타기도 했다. 그네를 타는 모습이 이상해 보이지 않을 나이로 종종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은 다연의 숨통을 얼마간 트이게 해주었다. 그러나 다연은 어쨌거나 서른이었다. 30년간 쌓아온 룰을 따르며 얌전히 살아가는 보통의 어른. 그도 그럴 것이 다연은 끝내 열여섯의 얼굴을 하고도 현실로부터 도망치지 못했으니까.

 다연은 일주일 중 삼일간은 마음까지도 사춘기 중학생처럼 어려진다고 느꼈다. 행복과 우울의 간극이 갑자기 거대해지고 웃음과 울음의 방출도 과감해졌다. 그러다 서른으로 되돌아가면 전부 도로 건조해지는 것이었다. 얼굴 근육이 미세하게 굳어지고 만면에 머금던 활기는 사그라든다. 마음은 온종일 일정한 농도로 예민해진다. 말랑말랑하고 마디마디에 선홍색이 어려 있던 손가락에 은근한 주름살이 자리 잡은 것을 내려다볼 때면 어쩐지 마음이 텅. 공허해진 속은 앞으로의 삶이 오롯이 어른이 된 나의 몫이라는 생각에 더욱이 막막해지곤 했다.

 그러다 하루는, 다연이 서른의 모습으로도 열여섯의 손마디처럼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여느 때와는 다르게 자취방 오피스텔 건물을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계단으로 올라간 날이었다. 계단을 한 칸씩 오를 때마다 어떤 여자의 흐느끼는 소리가 난간을 타고 흘러 내려왔고, 다연은 목덜미에 걸린 십자가 목걸이를 매만지며 달달 떨리는 다리를 붙잡고 올라갔다. 그러다 흐느낌이 귓바퀴 앞을 맴돌기 시작했을 때쯤, 다연은 난간 틈새로 귀신인지 사람인지 모를 여자의 웅크린 실루엣을 슬며시 훔쳐보았다. 흐릿한 조명 아래 여자의 얼굴을 알아본 순간, 다연의 심장이 잔잔했던 바다에 거친 포말이 일듯 크게 울렁였다. 웅크려 앉아 눈물을 쏟아내던 여자는 얼마 전부터 지독한 층간소음 문제로 몇 차례 서로의 집 앞을 찾아가 언성을 높였던 아랫집 여자였다.

 사생활의 테두리 바깥에서 만난 어른, 게다가 서로에게 피해만 끼칠 뿐인 철저한 타인의 꺼이꺼이 우는 모습을 몰래 마주한다는 건 생각보다 난감한 일이었다. 어쩐지 다연은 자신이 못된 사람이 된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물론 그 여자의 울음이 다연 때문은 아니었겠으나, 며칠 전 아랫집 현관문에 보란 듯이 붙여놓고 온 포스트잇이 선명히 떠올라 괴로워졌다. 대충 발꿈치를 쿵쿵거리지 말라는 둥, 세상을 그렇게 비겁하게 살지 말라는 둥 험한 내용의 쪽지였다. 서른 살의 다연은 어째서 이렇게 착하지 못한 걸까. 착해질 바에야 남을 미워하는 편이 쉬워진 지 이미 오래였다. 그 여자는 어떤 마음으로 계단참에 앉아 울음을 쏟아냈을까. 그럴 이유가 없다 싶으면서도, 묘한 불편감이 다연의 사위에 끈적하게 눌러 붙는 느낌이었다.

 다음 날, 다연은 열여섯이 되었다. 거울 속 자신의 뽀얗고 순진한 얼굴을 보자마자 다연은 무작정 아랫집을 찾아갔다. 퍽 대범했고 위험천만했다. 모르는 사람에게 서른과 열여섯의 두 모습을 모두 보여주는 건 그간의 규칙대로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 그런데 그날 다연은 그렇게 했다. 아랫집 문을 얌전히 두드리고 나서, 천연덕스럽게 말을 건넸다. 현관 앞 한껏 어려진 다연의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자태를 훑어보며 당황한 안색을 띤 그 여자에게.

 “저, 아랫집 사는 사람 동생인데요. 저희 언니가 이것 좀 전해달라고 해서요.”

 무턱대고 열여섯의 상태로 찾아가 그 여자에게 건넨 것은 딸기 맛 요거트였다. 여자는 다소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가 요거트를 건네받고는 어색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여자도 본인보다 한참 어린아이 앞에서는 꽤 친절한 편이었다.

 “그동안 조금 미안했나 봐요.”

 어색해진 공기에 다연이 말을 덧붙이자 그 여자는 생각보다 순순히 고맙다고 했다. 살짝 웃을 때 양 뺨에 예쁘게 보조개가 패인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다.

 “혹시 왜 울었어요? 어제 저녁에 계단으로 올라오다가 들었어요.”

 다연은 속으로 미쳤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순진한 열여섯 소녀의 얼굴을 하고 있다지만 이렇게 무례하고 잔인한 질문이라니. 열여섯의 다연은 걷잡을 수 없이 과감했다. 그 여자는 잠시 낯빛이 붉어지더니 의외로 괜찮은 답변을 골라내려는 듯이 약간 머뭇거렸다. 왜 울었냐는 질문이 익숙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그 익숙지 않은 질문이 마냥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 여자는 한참을 입 안에서 속엣말을 굴리고 굴리는 듯하더니 이내 답을 해주었다.

 “내가 너 맘 때쯤 말이야. 나한테 약속했었거든. 잘 살겠다고. 잘 살아 보겠다고. 근데 내가 나한테 바랐던 것은 모두 다 어느 정도 실패했어. 완전히 실패는 아닌데, 골고루 조금씩 실패했달까. 그래서 조금 울었을 뿐이야.”

 답을 듣고 나서 다연은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대자로 누웠다. 그 상태로 한동안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 여자가 열여섯 여자아이에게 단 몇 문장으로 설명해 준 울음의 이유가 다연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어젯밤 그 여자의 울음을 목격했을 때보다 더, 어른 다연의 마음과 열여섯 다연의 마음도 함께 휘저어 놓았다.

 언젠가 다연도 그런 약속을 했었다. 잘 살아보겠다. 영원 같은 사랑을 지켜내고, 미움 혹은 질투 뿐인 주변 사람들을 최대한 애정하고, 삶의 권태 따윈 없이 번듯하게, 버젓하게 잘 살아보겠다고, 내가 나에게 맹세했었다. 기억이 선연하다. 미래를 걱정하면서도 조금은 더 근사해질 나를 기대했던 어린 날의 소망. 매미가 탈바꿈하듯 어느 순간 몸도 마음도 엉성한 허물을 벗고 완전해질 어느 날에 대한 바람, 간절한 상상. 그런 것들. 그러나 모두 다 어느 정도 실패했다. 나에게 바란 것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내가 갖게 될 삶의 어떠한 형질에 대해. 건조하지 않으면서 단단한 어른의 마음 같은 것에 대해 더 자주 염원하곤 했었는데.

 다연은 다음날 서른 살로 돌아가면, 이번에는 진짜 어른 다연의 모습을 하고 아랫집 여자에게 찾아가겠노라 마음먹었다. 어쩌면 너무 부끄러워서 말로는 차마 전하지 못하고 또 포스트잇 위에 이렇게 써 붙여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어린애에서 갈데없이 그저 어른이 되었을 뿐이에요. 우리는 어른의 모습으로도 서로를 환대할 수 있어요. 나에게 바란 것을 단 하나도 이뤄내지 못한 비루한 어른에 불과하더라도, 단지 그러고 싶어요.

어른의 울음을 탐구하는 마음으로 글을 써요

p.s 본편의 창작 비하인드가 2월 15일,

포스타입(https://www.postype.com/@putsoseol)에서 발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