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월호《약속》: 네모난 약속

69편째 풋소설

2025. 2. 14.

🍏 2월호《약속》: 네모난 약속

69회 (2025.02.15)

2월호 주제 《약속》

네모난 약속

예림

진철은 오랜만에 차를 끌고 나오느라 아침부터 서둘렀다. 어제 깜빡 잊고 사무실 책상 위에 지갑을 두고 온 탓이었다. 종종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다.

책상 위 놓인 지갑을 발견한 진철은 가볍게 지갑 안을 눈으로 훑었다. 당연스레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 진철이 바지 주머니로 지갑을 넣으려던 찰나, 진철은 뒤늦게 무언가 달라졌음을 느끼고 지갑을 다시 꺼냈다. 그리곤 찬찬히 살폈다. 무언가 사라졌다. 그러나 진철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지갑에서 사라진 것은 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갑을 열었을 때 제일 먼저 보여야 할 것이 없었다. 투명한 필름 뒤로 이십 년 째 같은 자리를 차지하던 것.

가족사진이었다. 수없이 지갑을 열 때마다 봤으면서도 어쩌면 원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그때부터 무언가 사라지는 일이 계속되었다. 큰 아이는 학교 도서관에서 일기장을 도둑맞았다고 했다. 아내는 도시락을 도둑맞았다. 친구에게 받은 열쇠고리가, 인형 뽑기로 선물 받은 인형이, 1+1 세일을 해서 산 귤 한 박스가 사라졌다.

처음에는 대부분 그러려니 했다. 그러니까 필요한 물건은 맞지만 없어도 일상생활에 큰 지장이 없는 물건들이었다. 일기장이나 귤, 인형 같은 것들은 다시 사면 되었다.

그러나 물건들이 사라지는 일이 빈번해지고, 그럴 때마다 CCTV를 살피거나 주변인들을 탐문해도 되찾는 수가 없다는 기이함은 진철의 마음 한구석에 담아두었던 ‘설마’를 연상시켰다.

‘그들이구나. 그 이야기가 사실이었어.’

그러니까 그게 언제였더라. 몇 주 전 동료들과 밥을 먹을 때 스치듯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사랑을 먹는 사람들.’

“왜 팀장님, 그런 사람들 얘기 들어봤어요? 사랑이 담긴 물건들을 훔치는 사람들이요. 음, 선물이나 사진, 편지 같은 것들이요. 다 마음이 담긴 물건이잖아요. 사랑을 너무나 원하는데 본인이 직접 얻을 수 없으니까 남의 것을 뺏어서 누리고자 하는 심리래요. 너무 이상하지 않아요?”

진철은 황급히 휴대폰을 열어 NoA에게 물었다.

“사랑을 먹는 사람들에 대해 나온 것들 정리해 줘.”

눈앞에 쏟아지는 글자를 재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개인화되는 한국 사회···’

‘···늘어가는 1인 가구···’

‘···점차 숨는 사람들이 많아져···’

‘···타인의 물건을 사랑의 대체제로서 욕망을 채우고자···’

‘···분실 신고하기에 애매해서 그냥 넘기는 경우가 많아···’

‘···선물을 자랑하면 며칠 후 사라져 있어···’

그들은 무엇을 하는 거지? 그것들로 무엇을 하려는 걸까? 얼마나 깊은 의미를 투영해야 사랑을 훔치고 싶다는 결심을 내리는 걸까. 그저 일반적인 물건에 불과한데.

이를 증명하듯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랑을 먹는 사람들’에 대한 뉴스가 쏟아졌다. 사람들은 하루에도 두세 번씩 물건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심지어 길고양이의 사료를 훔치는 사람도 등장했다. 이러다 사람을 죽이는 거 아니냐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도 나왔다. 산모들은 불안에 떨었다.

그러나 사회심리 전문가들은 ‘사랑을 먹는 사람들’의 사랑을 갈구하는 본성 내면에 순수한 마음이 있기에 살인까지 저지를 용기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연구가 들어맞은 건지 사태가 심각해지는 동안에도 원인불명의 살인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사랑을 먹는 사람들‘에 대한 연구가 계속 진행됨에 따라 다양한 가설과 논문이 등장했다. 몇몇의 전문가는 양면성을 강조했다. 여럿이 있을 때는 ‘사랑을 먹는 사람들’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처럼 행동하다가 홀로 있을 때, 기회를 보다가 일을 저지르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주변인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물건을 훔치는 정도야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사랑을 먹는 사람들’의 양면적이고 음흉한 속내가 두려웠다. 물건을 빼앗기기를 여러 번 당하자, 마치 실제로 사랑을 빼앗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은 선물을 주고받기를 멈췄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 커피 한 잔 건네는 것이 조심스러워졌다. 주변에 사랑이 있는지 늘 확인했다. 사회는 점차 고립되어 갔고, 유례없는 상황에 극도로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결국 ‘사랑을 먹는 사람들’이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랑을 먹는 사람’이 되는 경우가 제일 심각했다. 받는 사랑의 무게가 전보다 못한 것을 느끼면 외로움은 서서히 분노와 경멸로 바뀐다. 사랑했던 그때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 상대가 의심을 거두면, 사랑을 먹고 달아난다. 가족과 친구, 동료, 연인, 어떤 관계에도 예외는 없었다. 사랑과 사람이 멀어지고 있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두 아이 아빠이자 가장인 진철은 일이 잡히지 않았다. 이미 그의 직장과 친한 친구도 ‘사랑을 먹는 사람들’이 되어 관계가 끊어진 지 오래였다. 아이들과 아내 역시 주변에서 ‘사랑을 먹는 사람들’을 접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러나 그저 사람들과의 교류를 줄이고 물건을 잘 지키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작은 아이는 얼마 전부터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단짝 친구가 ‘사랑을 먹는 사람들’이 되었다며 울었다. 아이는 고작 12살이었다.

이러다 진철의 모든 것인 가족을 잃게 될까 불안했다. 수를 써야 했다. 하나의 약속이 필요했다. 진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뾰족한 묘책.

고민 끝에 진철은 사진을 찍기로 했다. 우리가 사랑받고, 사랑하고 있음을 남겨두는 것. 사랑의 증표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 있었으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작가의 말

이어지는 이야기는 2월 19일 ‘포스타입’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