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마시며 지속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 생각한다. 지난 한 해 동안 얼마나 많은 가뭄과 폭우, 폭염과 한파가 있었나. 커피가 언제까지 생산될지 모르는 일이다. 우리가 치달아 가는 명료한 끝과 불확실한 희망 또는 체념이 커피 기름 곁을 둥둥 떠다닌다. 카페인의 힘을 빌려 세워온 나라는 노동 상품의 생산성과 예정된 말로도 한 모금 마신다. 언젠가는 더 이상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나를 편안하게, 동시에 무기력하게 만든다. 잠시 허무감을 느끼다가, 허무주의의 끝에 어떤 유익이 있는가에 대해 이전에 내렸던 결론을 다시 꺼내 든다. 마음을 다잡고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신다. 밀려드는 종말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세계는 모든 일에 끝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설명하려 든다. 맹세, 결단, 계약, 신념, 서약, 종교, 조작된 습관으로 옭아매 본들 물리법칙을 거스를 순 없다는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삶은 우리에게 너절한 안정감을 아주 가끔만 쥐여 준다. 언젠가 온전한 평안을 누리리라는 희망은 그렇게 인질로 잡혀 우리를 현실에 묶어 앉힌다. 견딜 수 있는 현실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현실을 적당히 외면하거나, 멋대로 재단해 남의 살에 꿰매 내팽개칠 뿐이다. 어느 순간 돌아보니 주변 사람들이 그랬고 거울 속 내가 그랬다. 오늘을 빼앗기지 않으려다, 작은 숨 쉴 틈이나 마련하려다 나도 모르는 새 그런 식의 삶에 발을 딛고 몸을 담갔다.

그래도 지금 내 맞은편엔 네가 있다. 너는 아이스커피를 마시고 조각케이크를 잘라 먹다가 머리를 싸매고 노트북과 씨름한다. 나와 나를 둘러싼 것들이 모조리 변하는 동안에도 너는 여기 있었고, 아직도 여기 있다. 너는 나의 웃자란 비인간성을 그런대로 사랑하고 일종의 나이테로 여긴다. 우리는 변해가는 서로의 모습을 비웃고 놀리면서 한편으론 감탄하고 동경한다. 우리의 수다에 아무 음료나 탄수화물만 하나 곁들이면, 웃어넘기지 못할 일이 없다. 너는 계속 내 시야에 존재하고, 나는 쭉 네 곁에 머무른다. 나는 그런 너를 바라보며 한량없는 애정을 느낀다. 네 곁이 내가 결국 돌아갈 집이라는 감각이 뱃속에서부터 자라나 피부를 감싼다. 근육이 이완되고 마음이 고요해진다. 카페 내부로 새어 들어온 한겨울의 냉기도 이 평안을 흩트리지 못한다.

나는 잠시 머리를 식힌다는 핑계로 네 옆으로 가 네 어깨에 기댄다. 네가 치열하게 걸어온 궤적을 구슬 모양으로 빚어 나와 함께 보낸 시간으로 엮어본다. 빼곡히 지내온 날들. 내가 너를 목격하듯, 너는 나를 목격한다. 누군가가 나에게 ‘당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증거를 대’라고 한다면, 나는 곧장 너를 불러 나를 증언하게 할 것이다. 나는 집중한 너를 바라보다가, 무엇을 하느라 그렇게 인상을 쓰고 있느냐고 묻는다. 너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어쩌면 곧 먼 곳으로 가게 될 것 같다고 답한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네 입술을 바라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좋은 기회라고. 네가 꾸려 온 것들이 결실을 맺는 시간, 쏟아온 시간과 에너지를 증명하고 꿈을 실현할 ‘다음 단계’가 눈앞에 있다. 하지만 그 말을 전하는 너는 애꿎은 컵 속의 빨대만 빙빙 돌리며 불안한 표정을 짓는다. 나까지 덜컥, 다가올 변화를 실감한다.

네가 떠난 이후, 나는 길을 걷다가도 종종 멈춰 서 입김이 흩어지는 것을 바라보곤 했다. 오늘도 우리가 서로의 고향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는다. 매 순간 너를 다시 만나고, 또 떠나보낸다. 그날 길에서 나눈 대화를 곱씹는다. 카페에서 나와 함께 지하철역으로 향하던 길, 눈발은 고요히 흩날리다가 내려앉길 반복했다. 질은 눈이 녹아 코트며 머리카락이 온통 축축했고 길은 미끄러웠다. 우리는 작은 우산을 나눠 쓰고 행여 넘어질까 서로의 걸음을 걱정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너는 문득 내게 “너는 네가 어떤 사람인 것 같냐”고 물었다. 나는 쉬이 대답할 수가 없어 괜히 딴소리만 늘어놓았다. 기준이 뭐냐는 둥, 자아는 너무 복합적이라는 둥 본질에서 빗겨 난 텅 빈 말로 당혹스러움을 감추려 했다.

나는 같은 질문을 네게 되물었고, 너는 나와 낀 팔짱을 쏙 파고들며 명쾌하게 답했다. “나는 지금이 좋아. 오늘 너와 보낸 시간이 좋고, 너와 나눈 대화가 좋아.” 나는 잠시 벙쪄서 생글생글 웃는 너를 바라봤다. 추운 날씨 탓에 네 코끝이며 뺨이 발그레했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즐거운 것, 그게 정체성이 될 수 있다니. 다시 머릿속이 맑아졌다.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관계는 시절에 얽매여도 정체성은 그보다는 견고하니까, 어쩌면 우리는 예정된 종말에 잠깐이라도 맞서 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집에 돌아와 떠나는 너에게 들려 보낼 편지를 적었다.

안녕 내 사람,

유한한 나지만 너에게만큼은 무한한 사랑과 응원을 보내

네가 나를 위해 그랬듯,

너를 위해 나를 조금씩 허물 때마다 그 자리에 새 삶이 싹텄고

우리는 그렇게 각자 넓어지며 서로를 많이 닮아온 것 같아

우리가 나눈 마음을 어떤 한 단어로 정의하기엔 참 모호하지

어린 시절에 친구가 된다는 건

내가 나를 만나기도 전에 너를 먼저 만나는 일이라서,

매번 내가 너인 양, 네가 나인 양 헷갈리곤 하니까

그동안 타인으로부터 나를 지킬 담을 공들여 쌓아왔지만,

여전히 너와 눈을 맞추면

경계는 녹아내리고 그 위로 즐거움이 흘러

무모하게 서로의 비밀스러운 속을 비집고 들어가 놀아도

상처는커녕 위로가 되더라

언제든 우리가 얼굴을 맞대면

어떤 죽음도 거스르는 웃음이 피어난다는 걸,

아무리 오래 떨어져 있더라도 잊지 마

영원을 약속한들 소용없겠지

하지만 내가 감히 평생을 논할 때

거울처럼 반짝이는 네 눈동자는 진짜니까

함께할 먼 미래를 거론하면

한술 더 떠 그 세부를 논하는 너는

오늘 내 곁에 실재하니까

어쩌면 이걸로 충분한 것 같아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또 우리의 시간을 맞자

수천수만 번 너를 데리러 갈게,

수천수만 번 나를 웃게 해줘

그럼, 안녕

잘 다녀와

  

지금 생각나는 사람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