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 어깨에 배낭을 걸친 남자가 통로 문을 열고 열차 내로 들어왔다. 그는 신속하게 좌석 번호를 확인하며 다가왔고, 선반에 배낭을 올려둔 뒤 내 옆좌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는 낯선 차림새의 그를 몇 차례나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뭐야, 그 모자는…”

 그는 대꾸 없이 눈을 감으며 귀에 이어폰을 꼽았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나 단정한 느낌을 주는 니트와 정장 바지를 입고, 머리엔 왁스를 발라 넘기는 깔끔한 스타일을 고수하던 그였다. 그런 그가 자유분방한 그래픽 티셔츠와 카고 팬츠를 입고, 머리엔 울 비니를 푹 눌러쓰고 나타난 것이다.

 “나름 잘 어울리네.”

 들리도록 일부러 더 크게 뱉은 칭찬에도 그는 무심하게 고개만 끄덕였고, 나는 그런 그의 볼을 쓰다듬으려다 어색하게 손을 거두었다. 맞아, 우리 헤어졌지.

*

 우리는 지난 겨울, 5년간의 연애를 끝냈다. 바람이 매섭게 부는 겨울 바닷가에서였다. 재이는 매운 닭꼬치 양념이 묻은 입으로 돌연 내게 이별을 고했다. 나로서는 돌연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별을 준비하는 남자의 눈빛과 태도를 몇 차례 봐온 바가 있었지만 재이에게서는 비슷한 낌새조차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내가 이별의 원인을 찾기 위해 머리를 열심히 굴리는 동안 재이는 아직 두 입 정도 남아있는 닭꼬치를 손에 들고 유유히 모래사장을 빠져나갔다.

 그날 이후 나는 슬픔을 참으면 배출되지 못한 눈물이 체내 어딘가에 축적된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며 삼켰던 눈물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제멋대로 흘러나왔다. 출근길 버스에서도, 회사에서도,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의 식사 자리에서도 눈치 없이. 그러고도 미처 나오지 못한 눈물들이 고이는 곳은 아무래도 마음인 것 같았다. 어느덧 봄이 와 가벼워진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가슴 한복판에서 한없이 가라앉는 듯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하루는 봄 햇살이 쏟아지는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다 말고 생각에 잠겼다. 마음을 꺼내다가 봄볕에 말릴 수만 있다면, 수분기 하나 없이 빠짝 말려 도로 집어넣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터무니없는 상상이긴 했지만 그 시간이 마냥 무의미하지만은 않았다. 공상 끝에 나는 묘안 하나를 떠올렸다. 그건 바로 이별 여행이었다. 그와 이별 여행을 떠나 지겨운 슬픔에서 빠져나오는 거다.

 재이와의 여행에서는 언제나 싸움이 잦았다. 지금 와 떠올려보면 제대로 기억나는 것은 한 개도 없을 만큼 사소한 이유들 때문이었다. 여행지에서는 아주 작은 문제들도 싸움의 발화점이 되곤 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이 내가 바라는 바였다. 예뻐서 소중하고, 소중해서 눈물 나는 추억들을 치사하고 유치한 기억들로 뒤덮어 버려야지. 다시는 기억하기도 싫고 떠올리면 눈물이 쏙 들어갈 만큼 구질구질한 이별 여행으로 우리의 마지막을 장식할 계획으로 재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

 열차에서 내려 숙소로 향하는 동안 재이는 묵묵히 내 짐을 들어주기만 할 뿐 별말이 없었다. 그리고 들어간 식당에서 그는 내 앞에 냅킨과 수저를 놓으며 첫마디를 꺼냈다.

 “배고프지.”

 이별 후 처음 만난 전 연인에게 건네는 말 치고는 다소 싱거운 첫마디였지만 나는 그 한 마디에 이상할 정도로 평온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말의 내용보다도 먼저 귀에 들어온 것은 그의 목소리였다. 듣는 것만으로 안심이 되는 아늑하고 나긋한 목소리. 내 곁에서, 가장 가까이서 들리던 목소리. 그 음성이 공간을 부드럽게 채우자 사사건건 싸움의 구실을 잡아 여행 내내 끔찍한 기억만 만들고 오겠다는 다짐은 금세 허물어졌고, 나는 어느새 바지런히 생선 가시를 발라 재이의 숟가락 위에 얹어주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여느 다정한 연인들처럼 풍경을 보며 걷고, 잠시 카페에 앉아 휴식도 취하며 여행을 즐겼다. 잠시 이별하기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다만 바로 옆에 있는 재이는 왠지 아주 멀리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열차에서부터 계속 거슬렸던 그의 옷차림을 또 한 번 훑어보았다. 그건 다시 보아도 재이답지 않았고, 그를 자세히 관찰할수록 옷차림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것이 낯설게 변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별 후 고작 삼 개월 만에, 재이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가 변하게 된 원인은 단연 이별일 것이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지만, 길 잃은 우리의 관계를 다시 좋은 쪽으로 굴려내면 재이도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을까. 나는 그와 이별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려 할 때마다 재이는 은근히 대화 주제를 돌리거나 자리를 피했다. 재이야. 넌 정말 우리가 이렇게 끝나도 아무렇지 않은 거야? 그 많던 사랑이 하루아침에 전부 날아간다는 게 말이 돼? 재이가 커피를 열심히 마시는 동안 나는 그를 향해 쏟아내고 싶은 말들을 열심히 삼켜냈다.

 카페에서 나온 재이는 이제 그만 숙소로 돌아가자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그의 손목을 끌어 바닷가로 걸었다. 우리의 끝을 지켜본 그 바다로. 나는 모래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재이는 조금 머뭇거린 후 약간의 거리를 두고서 앉았다.

 “여기잖아.”

 “…”

 입을 꾹 닫은 채 먼 곳만 쳐다보는 재이. 죄책감이라도 느끼고 있는 걸까.

 “여기서 네가 나 혼자 두고 갔잖아.”

 “그랬지.”

 “나 너무 추웠어. 살면서 제일 추운 날이었어.”

 춥다고 하면 늘 겉옷을 벗어 어깨 위에 얹어주던 재이. 이제는 그것도 필요 없어. 그냥 나를 안아주었으면. 그거면 되는데. 그럼 나를 아프게 했던 것 전부 다 용서할 수 있는데.

 하지만 재이는 다정한 포옹 대신 팔짱을 낀 채로 이렇게 말했다.

 “나도 그날 무지 추웠다.”

 그때 나를 서글프게 한 것은 차가운 그의 말투도, 벌어져 있는 그와 나 사이의 간격도 아닌, 수분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그의 눈가였다. 바닷가에 다다를 때부터 이미 잔뜩 물기를 머금은 나의 눈가와는 너무도 다른 그의 건조한 눈가. 나는 결국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를 감추지도 못하고 꺽꺽거리며 자리를 떴다. 내 마음은 그대로 그의 옆에 두고. 그가 가고 나면 덩그러니 남겨질 마음, 해변가를 뒹굴다 파도에 휩쓸려 조용히 익사할 마음, 그래도 좋으니 어쩔 수 없는 마음을 두고...

3월 15일 포스타입(https://www.postype.com/@putsoseol)에서 재이의 관점에서 전개되는 소설 비하인드<호우주의보>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