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유독 그 애의 얼굴 위에는 그늘이 져 있던 모습을 종종 되짚어 보았다. 그러다 보면 나만이 목격했던 그 애의 무구한 미소가 떠올랐다. 독초가 아니라 꼭 생생한 봄날의 초록빛 푸성귀처럼 예쁘고, 그래서 나만은 그 애를 그늘이 아니라 봄볕으로 기억해 주어야겠다고 마음먹게 했던. 말갛고 아픈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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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이 오면 글이 멈춘다. 글을 쓸 수가 없다. 기나긴 겨울이 어느샌가 사라지고, 따사로운 기운이 얇은 린넨 커튼을 뚫고 들어오면 견딜 수 없는 죄의식에 사로잡히기 때문일까. 봄철의 햇볕이 너무도 안락하고 평온해서. 세상의 불행을 찾아 글을 쓰는 내가 문득 가식처럼 느껴져 온몸이 오그라든다. 내가 쓰는 글은 전부 다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는 한낱 줄글 덩이로 여겨진다.

 그 애가 죽고 이십 년이라는 시간이 빽빽하게 흘러왔다. 글이 안 써지는 봄날엔 습관처럼 기억 저편에서 그 애를 끄집어내고, 그 애는 여전히 내 마음을 쿡쿡 찌르고. 나는 이십 년이라는 세월을 미워하게 된다. 그 애가 살아낼 수도 있었던 그 아무것도 아닌 세월을. 그 애는 결국 살아내지 못한 수많은 봄을.

 멍한 눈으로 내 팔을 붙잡을 때 느껴지던 까슬거리는 피부, 자작나무처럼 흰 손. 그 손아귀에 내 팔이 붙들리면 나는 꼼짝없이 마음이 두근댔다. 우리는 서로의 팔과 손이 맞닿은 채로 초등학교 뒤편의 자그마한 둔덕을 올라갔다 내려오기를 반복하곤 했다. 둔덕의 내리막을 따라 일렬로 핀 꽃들은 사르르 녹아내릴 것처럼 산들거렸다. 보자마자 쉬이 이름이 떠오르는 꽃들보다, 도무지 정체 모를 꽃들이 더 예뻐 보였다. 나는 언제나 그랬다. 이름이 없는 꽃에 더 마음이 갔다.

 한가로이 야산의 꽃들을 어루만지며 봄볕 아래 거닐던 그 시간에는. 그토록 아름답던 풍경을 볼 때는 그 애가 웃었다. 작은 몸을 다 뒤덮었던 그늘이 걷히고 봄볕처럼 웃었다. 학교가 끝나면 그 애는 여지없이 내 팔뚝을 붙잡곤 했다. 어디든 가자. 날 어디로든 데려가 줘. 그 애의 텅 빈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눈빛을 보면 마음이 울렁이면서도 불편했다.

 그 애도 어렸고 나도 어렸다.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그 애의 부실한 손아귀가 내 팔에 끈끈하게 들러붙은 광경을 다른 애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는 그 애를 뿌리쳤다. 같은 반 아이들의 힐끗대는 시선이 꺼림칙했다. 나는 얘랑 달라, 나는 그늘지지 않았어, 마치 그런 몸짓으로 그 애의 손을 힘껏 떨쳐냈다.

 그러고서, 유유히 교실을 빠져나가는 그 애의 뒷모습을 봤다. 그 애는 걸음이 느렸다. 내가 충분히 따라 잡을 수 있었다. 금세 따라잡고서 내가 그 애의 팔을 붙잡고 칭얼거릴 수도 있었다. 가자, 언덕으로 가자. 꽃들 보자. 보러 가자. 미안하다는 말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럴 수도 있는 거였는데.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 애가 죽었다. 자기 아빠 손에 맞아 죽었다고 했다. 그 어린 것이, 그 작은 것이. 우리가 아홉 살 때였다. 나는 어느덧 스물아홉이 되었고 그 애는 그 이후로 더 자라지 않았다. 무수한 봄날을 다 놓치고 아홉 살에 머물렀다. 나는 온갖 봄볕을 다 내리쬐고도 세상에 불만 가득한 어른이 되었다.

 나는 이제 어른이 되어 글을 쓴다. 글이 써지지 않을 때는 그 아이를 생각한다. 둔덕의 내리막을 따라 듬성듬성 피었던 야생 꽃처럼, 내가 외면한 세상 어딘가에 마구 피어나고 있을 불행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봄철의 햇볕이 아무리 반짝여도 그늘진 곳에 핀 이름 모를 꽃은 기어이 시들어 간다. 그래서 유난히도 햇살이 따사로운 봄이 오면 나는 기어이, 글을 쓴다.

올해 봄엔 눈이 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