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월호《봄볕》: 시샘 내음

74편째 풋소설

2025. 3. 21.

🍏 3월호《봄볕》: 시샘 내음

74회 (2025.03.22)

3월호 주제 《봄볕》

시샘 내음

예림

나 사랑해? 이소가 물었다.

응, 사랑하지. 내가 답했다.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거짓말이라는 이소의 말에 따르면 나는 이렇게 답했어야 했다.

아니, 질투해.

생일을 스물네 번이나 맞아 놓고 질투를 사랑으로 착각했을 리는 만무하다. 질투라는 걸 알면서도 눈 감았을 뿐이다.

이소는 201호 강의실을 빠져나오면서 내 이름을 불렀다. 그렇게 해맑은 미소를 하고 나를 찾는 눈동자는 겪어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일상을 주고받았다. 노트북 한 켠에 이소 이름이 떠오르면 어떤 것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소의 전화번호를 물었고, 이소 이름 옆에 붙었던 학부와 학번은 금세 하트 이모티콘으로 바뀌었다. 알고리즘 수업을 채 세 번도 듣기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내뱉는 순간까지도 가망 없는 일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약속들을 했다. 남들은 이런 일들을 하면 행복하다고 하던데 나에게는 작은 역할극처럼 느껴졌다. 연인처럼 굴 수 있도록 허락된 사람 같았다.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투정도 부리고, 같이 시간을 보내며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괜찮은 사람.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상대가 꼭 이소가 아니어도 괜찮다고 인정하게 되었다.

그걸 일일이 이소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기에 가만히 손을 잡고 있었다. 이소의 손은 항상 엄청 차갑거나 엄청 뜨거웠다. 나는 언제나 열이 많은편이었기에 우리가 겨울에 만난 건 행운이었다. 다정한 연인처럼 이소의 손을 녹여주고 따뜻한 온기를 나눌 수 있었다.

따뜻하다, 네 손. 이소가 말했다.

응. 따뜻하지?

신기해. 핫팩 같아.

이소는 내 왼쪽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그 향이 났다. 섬유유연제 향일 텐데 어느 꽃 향도, 비누 향도 아닌 묵직하고 독특한 향이었다. 맡을 때마다낯설었다. 이소 향기가 코를 간지럽히면 흠칫 놀라곤 했다.

맞다. 이번에 알고리즘 과제 했어? 역시 이소가 물었다.

아니.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많이 어려워?

응. 애들이랑 한참을 고민했는데도 답이 없던데. 얼른 시작해야 할 걸.

그때부터였을까. 불편한 느낌이 꼬물꼬물 올라왔다. 이소의 말이 귀에서는 옳게 들리다가 뇌를 거치면서 이상한 방향으로 해석됐다. 예를 들면‘얼른 시작해야할 걸’은 ‘넌 아직도 과제를 안했니’라는 타박으로, ‘애들이랑 한참을 고민했는데도’는 ‘나는 학교에 친구가 많은데, 넌 아니지.’ 따위의 비아냥으로.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이소가 의미를 가지고 던진 말이 아니라는 것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귀에 들린 그대로를 이해해. 세뇌하듯 되뇌어 봐도이소는 자꾸만 내 깊은 속 무언가를 건드린다. 이소의 향이 달갑지 않다.

반가운 인사를 받거나 꼬박꼬박 연락을 나누거나 발신자가 ‘이소♡’인 전화를 받을수록 요상한 곳에서 심술이 자라나고 있었다. 이소의 가족 때문에, 학업 때문에, 해맑음 때문에, 혹은 외모 때문에. 덕분에 내가 맡은 역할을 엉거주춤하게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 이상한 필터 때문에 이소에게 이별을 고했다. 미안해. 내 뇌가 네 말을 이상하게 풀어내. 네가 무슨 말을 할수록 네가 미워지기만 해. 난너한테 미안해지기만 해. 우리 그만하자. 물론 이 모든 문장은 입으로 발설되면서 한 문장으로 축약되었다.

우리 그만하자.

일 년이 지났다. 홀로 봄볕이 물든 캠퍼스를 걸었다. 벚꽃이 핀 나무 주변으로 많은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저마다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햇살에 자연히 얼굴이 찌푸려졌고,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도록 신경 써서 걸어야 했다.

본관 앞 둥그런 물을 뿜어대는 분수대가 눈에 들어왔다. 위치 에너지를 받아 바닥으로 떨어지는 물줄기를 멍하니 바라보는데 순간 그 향이 느껴졌다.

나를 질투하게 만든 향. 내가 질투하던 냄새. 이소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완전 봄이다. 나 사진 찍어 주라. 이소는 맑게 웃으며 벚나무 앞에 선다. 벚꽃과 분수, 그리고 봄볕. 부족한 것 하나 없었다.

🌸

나 예쁘지. 예뻐 죽겠지.

카메라를 들려다가 그만두었다.

작가의 말

제 특기는 질투랍니다. 으으

2월호 독자 후기

💭 "cuti"님 - <뮤한한 사랑과 위로를> 문득 문득 친구와의 대화가 떠오르며 그래, 내가 친구에게 가졌던 마음은 이런 마음이었을 거야 라는 회상을 하게 돼요. 소설을 다 읽고 제목을 한 세 번 정도 속으로 되뇌었네요. '뮤한한 사랑?뮤한한? 뮤한..?' 무한한 사랑을 유한한 내가 보낸다.. 레퍼런스로 삼아 제가 다음에 누군가에게 말해주고 싶어요.ㅎㅎ

💭 "수요"님 - <나에게 바란 것은> 아랫집, 윗집의 구분이 중간에 뒤틀린 것 같았지만, 그 마저도 방해할 수 없던 몰입이 인상깊습니다.

보내주신 후기는 모두 감사히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