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원과 원룸 사이 크기인 보민의 집은 언덕 위 엘리베이터가 없는 빌라 8층에 있었다. 언덕 위 보민의 집은 여름이 되면 하루에 모기를 10마리 넘게 잡아도 끊임없이 윙윙 소리가 들렸고 겨울이 되면 얇은 벽 사이로 외풍이 들어 겉옷을 두 겹 껴입어도 손이 시려웠다. 집 위치가 위치인지라, 배달을 시킬 때면 가끔 ‘이런 씨발, 뭐 이런 곳에서 배달을 다 시키고 지랄이야.’하며 욕을 지껄이면서 배달을 하시는 기사분들도 계셨다. 당연히 매일 언덕 위를 오르고 엘리베이터가 없는 계단 8층을 헉 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땀방울도 함께였다. 혼자 사는 보민은 그럴 때마다 지겹다와 무섭다의 감정을 오갔지만, 그럼에도 집이 싫지 않았다. 누군가는 작은 돈이라 하겠지만, 보민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은 150만원으로 꾸민 보민만의 섬세한 취향으로 가득한 소품들이 소중했고 무엇보다 높디 높은 집 안을 밝게 비추는 봄볕의 채광이 이 집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였다. 보민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전등이 필요 없을 정도로 밝은 빛을 받는 집에서 눈이 부실 정도로 따스하게 웃는 연인의 웃음을 보며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시계가 오후 2시를 가리키는 대낮인 지금, 보민은 연인과 침대에 누워 손을 잡고 각자 지냈던 어제의 일상을 공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보민은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건 꿈이었다. 보민의 손을 놓기 싫어 엄지가 아플 정도로 움켜진 큰 손도,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맞댄 온기도, 연인의 시원하고 낮은 목소리도, 봄볕 아래에서 해사하게 웃는 이 미소도 다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민은 아주 똑똑히 알고 있었다. 이 순간들이 꿈이란 걸 알아챈 건 처음부터였다. 보민과 연인은 동거를 하지는 않았지만, 동거 비슷하게 같이 지내는 시간이 길었다. 연인은 동거를 하지 않아서 보민의 집에 자주 놀러왔고 지내다 가는 날이 잦았다. 특별히 하는 일이 있던 건 아니었다. 주말을 낀 저녁에 만나 늦은 밤까지 영화를 보다가 까무룩 잠에 들어 느긋하게 11쯤 일어났다. 부스스한 머리를 묶고 침대에 비스듬히 앉아 있으면 연인은 커피를 타 주었고 보민과 연인은 뜨거운 커피를 호로록 소리를 내며 마셨다. 가볍게 점심을 먹고 산책을 가거나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저녁은 성대하게 만들어 먹거나 시켜 먹었고 항상 같이 샤워를 한 다음 팩을 붙이고 서로를 웃기게 해서 팩을 주름지게 만드는 게임을 했다. 밖에 나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 보민과 연인은 동네 안에서 노는 걸 좋아했고 둘만의 시간을 가지는 걸 중요시했다.

하루는 연인이 보민을 위해 요리를 하고 있었다. 보민은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하고 있었고 연인은 인덕션 앞에서 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있었다. 보민이 후라이팬 닦아야 한다고 말을 꺼내려 고개를 든 순간, 피부가 다 벗겨져 뼈가 보이는 손목과 진물이 다 흘러내리는 뒷목, 살점이 떨어져 나간 얼굴을 한 연인이 봄볕을 받으며 싱긋 웃고 있었다. 밝은 햇살보다 찬란히 웃는 연인의 저 미소를 절대 잃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는데, 그랬었는데, 모든 게 엉망이 되는 건 역시 한순간이었다. 딱 이 날이었다. 연인이 보민을 위해서 요리를 해주겠다고 오전에 일어났었다. 잠이 많아 오전에 일어나는 걸 힘들어하는 연인이 일찍 일어나는 게 신기하다고 생각했던 봄이었다. 연인은 일어나서 보민에게 샐러드 파스타를 해주겠다고 파스타 면을 조잘거리면서 삶았고 딱 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며 보민을 보며 해맑에 웃던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렸다. 쾅-, 소리 이후에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 발밑이 흔들리는 감각, 흔들리는 시야, 연인의 입꼬리가 아래로 휘어지는 모양. 몸에 무거운 것들이 가득 차고 생명이 꺼져가는 느낌이 드는 것보다 보민이 제일 무서웠던 건, 끝까지 연인의 손을 잡고 있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눈앞은 여전히 검정으로 가득했지만, 청각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살아있다고 했던가, 보민은 그 말이 맞다는 생각을 했다. 깜깜한 눈앞에 비집어 들어오는 소리들이 있었다.

 “보민아, 너라도 일어나야지.”

 “거기 지하에 가스가 샜는데 누가 라이터를 버리고 가가지고, 어이고 어이고.” 

 “현재 사상자는 26명으로,…”

 알고 싶지 않은 현실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밀려들어왔다. 보민은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았는데, 보민의 시간은 연인과 요리를 하던 시간에서 멈춰있는데, 다들 양옆에서 곡소리를 하고 있었다. 보민은 어중간한 생명의 상태에서는 신기한 능력이 생긴다는 걸 알았다. 보민은 앞으로의 시간을 잃어버리기로 결심했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무것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회피라는 단어가 제일 알맞겠지만, 보민은 중지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로 했다. 이게 일시중지든, 영구중지든, 중지의 기간은 보민도 알지 못하지만, 보민은 일단 중지하기로 했다. 연인의 모습이 원래의 모습이든, 폭파된 직후에 본 너덜너덜한 연인의 모습이든 보민은 연인의 찬란히 웃는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자신의 시간쯤은 잃어버려도 전혀 상관없었다. 연인이 없는 곳은 보민에게 현실이 아니기에, 오히려 보민의 꿈이 보민에게 현실이었다.

사랑사랑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