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을 쉼 없이 오르다보니 시선 끝에서 익숙한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낡은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당엔 잡초를 배경으로 꽃들이 드문드문 피어있었고, 현관문은 으레 그렇듯 열린 채였다.

 “이거 여기 둔다?”

 나는 빌려 갔던 게임팩들을 바닥에 내려두며 말했다. 부쩍 오른 기온 탓에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얼굴 가를 타고 슬며시 흘러내렸다. 예상하긴 했지만 집은 훨씬 더 어수선한 상태였다. 이미 박스 안에 정리되어 이동만을 기다리는 물건들도 있었지만, 분류되지 못한 채 바닥을 나뒹구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예원은 그 틈에서 조금 지친 듯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안 돌려줘도 된다니까, 괜히 짐만 늘어나게…”

 그녀는 취업한 직장 근처로 급히 집을 옮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합격 통보를 받고 난 후 예원의 집에서 열린 축하 파티에서 뒤늦게서야 그 필요성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회사로부터 거리가 꽤 되니 이사를 가야 하지 않겠냐는 대학 동기 진석의 물음에 예원은 합격 소식을 접했을 때보다 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한 얘기였지만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한 표정. 한동안은 그 얼빠진 얼굴이 내내 머릿속을 맴돌아 덩달아 나까지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하기야 성인이 되자마자 첫 자취를 시작한 집이니 자그마치 6년이었다. 나도 예원만큼이나 그 집에 얽힌 기억과 붙은 정이 많았다. 예원과는 같은 중,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까지 가까운 곳으로 다니게 되었기에, 나는 그녀의 대학교 동기들보다도 더 자주 그 집을 드나들고는 했다.

 예원이 마실 것을 내오겠다며 냉장고를 뒤적이는 사이 나는 평상시에 그리 눈여겨보지 않았던 그녀의 집을 찬찬히 살펴봤다. 곳곳에 예원의 취향이 담겨 있었다. 쉬폰 커튼은 햇빛으로 물들어 방안의 빛을 부드럽게 만들었고, 걸어둔 풍경은 바람이 스칠 때마다 청아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또 벽에 테이프로 대충 붙인 것치고는 꽤나 세밀하게 그린 수채화 그림들, 시집으로 빼곡한 책꽂이, 집안에 생기를 더해주는 작은 화분들. 예원의 집은 이사 준비로 인해 혼란한 와중에도 차분하고 고요한 느낌을 뿜어내고 있었다.

 예원은 정리하던 것만 마무리할 테니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내게 당부했지만, 나는 할 일들을 찾아 나서며 예원을 보조했다. 예원은 늘 남을 위해 헌신하면서도 정작 도움을 받는 일에는 서툴렀다. 내가 성인이 되고 처음 만난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우울해하자 한걸음에 달려 나왔고, 인간관계로 힘들어할 때도 진심을 다해 고민을 들어주었지만 내게 도움 한 번 청한 적이 없었다. 그녀의 전공 시험이 밤새 내 이별을 위로해 준 다음날이었다는 것도, 겨우 사소한 다툼들로 고민에 빠진 나를 위로해 줄 당시 예원이 학과 내 퍼진 이상한 소문으로 더 심하게 괴로워하고 있었다는 것도 매번 다른 누군가를 통해 전해 들어야 했다. 예원에게는 늘 고마움을 느꼈지만 서운한 것도 사실이었다. 성별이 다르다는 것 때문인지, 유독 나에게만 그러는 건지 알 길은 없으나 예원은 다른 친구들과 나를 다르게 대했다. 가장 친하지만 가장 먼 사이.

 …그러고 보면 예원은 나에게 무슨 의미일까. 또 나는 예원에게 무슨 의미일까. 오랜 시간 함께 했으면서도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 의아했다. 예원이 이사를 가고 나면, 나는 예원이 그리울 거고, 보고 싶을 거다. 허전하겠지. 무척 심심하기도 할 거다. 그렇다고 해서 슬프다거나 못 살겠다거나 하진 않을 것 같았다.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얼굴 볼 시간조차 없지는 않을 테니까. 비록 자주 보지는 못하더라도 변함없이 예원이는 내 소중한 친구고, 우리 우정도 무사할 것이었다. 그런데 예원은? 나는 예원과 막역하게 지내면서도 그 애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책상의 짐들을 옮기고 나니 발끝에 뭔가가 걸렸다. 책상 아래에 자그마한 장식장이 있었다. 장식장 속 인형들은 택을 붙인 채 얌전히 앉아있었고, 만화책들은 비닐에 깔끔하게 싸여있었다. 그리고 선물로 받은 듯한 각종 기념품 과자들은 손도 대지 않은 건지 처음 상태 그대로 포장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비좁고 어두운 공간에서 너무도 깨끗하게 정돈된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그래서 신성해 보이기까지 했다.

 내가 눈짓으로 묻자 예원은 커다란 비닐봉투 안에 갠 옷을 집어넣으면서 자기도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렸을 때 아빠가 고급 초콜릿을 한 박스 사 왔었거든. 언니랑 동생은 맛있다고 며칠 만에 다 먹어치웠는데 나는 그게 사라지는 게 너무 싫은 거야. 아껴 먹으려고 꾹 참고 서랍 속에 넣어뒀었는데 다 녹아버린 거 있지. 그때 그렇게 울어놓고도 그래. 왜 그럴까.”

 순간 내내 바스락대던 비닐 소리가 멈추었고, 그 적막이 예원의 자그마한 중얼거림으로 채워졌다.

 “…정말 왜 그러는 걸까. 좋아하는 건 가장 마지막까지 아껴두고만 싶어.”

 예원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창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옆모습에 나도 하려던 잔소리를 그만두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열린 창으로 들어온 바람에 먼지들은 나풀거리고, 회전하며 낙하했다. 어지럽게, 아주 어지럽게…

 조용하던 집 안에 요란한 소리가 일어났다. 장식장은 깨끗이 비워져 있었고, 너무 아껴서 포장도 뜯지 않은 물건들은 충격에 구겨지고, 으스러지고 있었다. 내가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예원이 장식장의 물건들을 전부 쓸어 쓰레기봉투 안에 쏟아내고 있던 것이다. 그것도 눈가가 축축해진 채로. 나는 영문도 모른 채 휴지를 뽑아 서둘러 예원에게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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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묵 속에서 정돈이 끝나자 나는 예원을 도와 쓰레기봉투를 밖에다 내놓았다.

 “진짜 많이 좋아했는데.”

 예원은 쓰레기봉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가져가면 되잖아.”

 나는 쉽게 답했지만 예원은 미동 없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전히 달기야 하겠지, 그치만 이미 다 녹아버렸잖아… 좋아하는 마음도 방치하면 다 녹아버리는거야. 초콜릿처럼. 달콤한 맛이 사라지고 나면 쓸쓸함만 남았던 그 슬픈 초콜릿처럼.”

 예원은 하려는 말이 아직 남은 듯이 입술을 들썩이다가 내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가. 잘 가.“

 다시 나를 안 볼 사람처럼, 애틋하게.

널 좋아하는 마음만큼은 아끼지 말았어야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