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서리가 둥근 창 너머로 얼핏 흰 빛깔이 보였다. 옆좌석에 앉은 덩치가 우람한 아저씨의 불룩 나온 복부 앞으로 해영은 고개를 살짝 빼서 창문을 연신 힐끗거렸다. 흰 세상. 비행기에서 내리면 해영은 흰 세상에 첫발을 딛고 완전한 이방인이 된다. 화이트호스의 4월은 온통 눈밭이라고 했다. 해영은 인생 처음으로 맞게 될 4월의 겨울을 상상하며 벌써부터 옷깃을 여몄다. Dear passengers, we’ll be landing at Whitehorse International Airport shortly. 흘러나오는 기내 방송에 해영은 좌석 등받이를 바로 세웠다.

*

 얼마 전 서울에는 봄눈이 내렸다. 100년만에 내리는 4월의 눈이라고 했다. 해영은 그 서울의 봄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잠시나마 만개했던 벚꽃은 비와 눈으로 다 눅진해졌고 길가의 앙상한 우듬지가 강풍에 흔들리는 속에서 꿋꿋이 내리는 봄눈은 더없이 얄미웠다. 벚꽃 나무 사이로 추적거리는 진눈깨비를 보면서 해영은 난데없이 서울을 떠나 먼 곳으로 이사를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어차피 서울이 집이었던 적 단 한 번도 없었다. 몇 년전 홀로 상경한 해영에게 서울은 내내 잠시 빌려 쓰는 공간에 불과했다. 이미 서울에서도 해영은 이방인이었다. 그래서, 이왕이면 완전한 이방인이 되기로 했다.

 실은 서울이 미운 게 아니었고 봄눈이 싫은 것도 아니었다. 해영은 그저 스스로 바보같이 느껴지는 기분을 견딜 수 없던 거다. 서울이 잠시 빌려 쓰는 공간 같아서, 이곳에서 만난 인연들도 다 잠시 빌려 쓰는 인연 같았다. 지나가는 공간, 지나가는 풍경, 지나가는 사람들. 결국 다 지나갈 모든 것에 자취를 남기려 무진 애를 쓰는 제 모양새가 어설프고 우습게 느껴졌다. 해영의 삶의 역사를 채워온 무수한 관계들은 대부분 끝내 끊어지고 말았다는 사실에 조금 지쳤는지 몰랐다. 끊어진 관계를 해영이 무척 사랑했었단 사실에도. 해영은 언제나 사랑하지 않는 척하면서 너무 사랑했으니까.

 해영은 있었다가 홀연히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곤 했다. 소용이 다한 마음들에 대해서. 다음, 그 다음을 기약했던 저마다의 마음은 탄성을 잃고, 어느 하나는 상처에 허덕이고, 분명했던 아쉬움은 서서히 무뎌지고. 그러다 퍼뜩 떠오르는 옛 마음. 그러면 행복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홀연히 자취를 감춘 것들을 갈구하는 헛된 욕망에 빠져들고. 그런 소용돌이의 반복. 그 속에서 해영은 자꾸만 잊어갔다. 잘 살고 싶은 마음, 사람을 애정하는 마음 같은 거. 시간이 갈수록 잊는 마음들이 자꾸만 늘어갔다.

 캐나다행 비행기표와 숙소를 예약하며 해영은 서울에서 정리할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에 또 한 번 실망했다. 딱 하나 떠나기 전 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두 달 전부터 다니기 시작한 피아노 학원에 사정을 말하고 남은 기간에 대한 환불을 요청하는 일이었다. 부디 자신의 사정이 환불에 대한 타당한 근거가 되어주기를 바라며 최대한 뻔뻔스러운 기세로 무장한 채 학원에 들어선 해영은 막상 선생님 앞에서 또다시 움츠러 들었다.

 제가 멀리 떠날 거라서요, 캐나다로. 거기는 눈이 많이 온다고 해서. 아, 아니요. 별일은 없고 그냥 조금 지친 것 같아서요. 많이는 아니고 조금…. 연이은 선생님의 질문에 해영이 얼버무린 대답은 전혀 타당하지 않아 보였다. 피아노는 캐나다 가서도 치실 거죠? 예상 못 한 질문에 해영은 한껏 바보 같은 답을 했다. 거기서도 피아노를 칠 수 있나요? 선생님은 웃음을 머금고 선선히 대답해 주었다. 그럼요, 피아노는 어디에나 있죠.

*

 비행기가 착륙하고 탑승 계단을 한 칸씩 내려갈 때마다, 흰 세상이 해영의 눈앞으로 점차 가까워졌다. 셔틀버스를 타고 공항 터미널로 이동하면서 해영은 바깥 풍경을 응시했다. 눈밭이 된 활주로와 야트막한 둔덕에 화이트 시럽처럼 쌓인 눈덩이를 보며 날숨을 내쉬자 버스 창문에 입김이 서렸다. 화이트호스. 해영은 얼마간 또 빌려 쓰게 될 이 공간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대부분 여행객들이었다. 해영은 이곳에서 마음 편히 이방인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문득 여기가 어디라고 무작정 찾아왔나, 내가 미친 건가라는 생각을 했지만 해영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애초부터 잠시 머무를 곳을 찾아온 거였다. 애정하는 마음, 잘 사는 마음 같은 걸 이곳에서 되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이토록 낯선 공간을 사랑하게 될 리 없다고 생각하며, 해영은 부러 무심한 눈으로 생경한 풍경을 살폈다.

 공항을 나가면 시내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음악 스튜디오부터 들러서 피아노 레슨을 등록할 작정이다. 해영은 레슨을 등록할 때 받게 될 질문들을 떠올렸다. 왜 먼 한국 땅에서 이곳으로 오게 됐는지, 원래 피아노를 좋아하는지 같은 질문을 상상하며 미리 답변을 읊조려 보았다. 한국이 추워서, 차라리 더 추운 곳으로 왔어요. 피아노는 계속 배울 거예요. 어디에나 있는 것들을 사랑해 보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