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월호《이사》: 이사놀이

79편째 풋소설

2025. 4. 19.

🍏 4월호《이사》: 이사놀이

79회 (2025.04.19)

4월호 주제 《이사》

이사놀이

예림

화선이 이사 문제로 골머리를 앓은 지 딱 삼 주가 지났다. 발품을 팔수록 좋은 집을 구할 수 있다는 직장 선배의 말에 아껴두었던 휴가까지 써가며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바쁘게 돌아다녔다. 직장에서 답습한 대로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매물 관련 소문도 바지런히 수집했다. 이 집은 저렴한데 왜 여적 주인이 나타나지 않은 건지, 화선이 후보에 올린 집은 보러 오는 사람이 많은지, 계약일을 맞춰줄 의향이 있는지를 열심히 캐냈다. 부동산 사장 다수는 꺼림칙한 불편함을 은근하게 드러내면서, 엉성하게 감추기는 했어도 결국 대답을 내주었지만, 사거리에 위치한 스마일 부동산 사장은 계약도 안 할 거면서 왜 자꾸 찾아오냐며 싫은 소리를 했다.

저녁을 해결한 후면 주섬주섬 노트북을 켜고 부동산 사이트를 무심하게 뒤적거리는 습관이 생겼다. 그 덕에 길을 걸으면서도 이 집은 몇억, 저 집은 몇억 소리가 절로 나왔다. 연예인 누구누구가 샀다는 건물이나 친구 아무개가 산다는 집도 괜시리 클릭해 보며 나의 삶과 저쪽의 삶을 나란히 두고 저울질해 보였다. 그때마다 항상 화선의 삶이 더 무겁고 차가운 데다 재미도 없었다. 팔자가 엉긴 시점을 찾으려 과거를 파내며 내려가다가, 장씨 가문 뿌리를 더듬거리며 올라가다가, 이것도 저것도 의미 없다는 결론을 내리곤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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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동 아파트 현관에서 나오는 키 큰 아가씨나 장미 빌라 앞에 차를 세우고 나 동으로 들어가는 아저씨를 보면서 저들의 집은 누구 것일까 생각했다. 아가씨의 어깨에는 알파벳 C와 C가 좌우 반전되어 겹쳐 있는 로고가 크게 박힌 체인 백이 걸려 있었고, 아저씨가 거칠게 주차한 자동차의 번호판 위에는 정확히 삼 등분된 원 하나가 꽂혀 있었다. 집 명의는 문서에 찍힌 이름을 보지 않고서야 알 수 없었기에 화선은 대충 눈에 보이는 정황들로 저들 집이겠거니, 하고 단정 지었다. 냄새가 난다, 화선은 그렇게 표현했다.

내 집을 찾다 참전해 버린 누구 집일까 놀이에서 쉬이 벗어날 수 없었다. 어른들의 놀이란, 현실의 형세란 그런 것이다. 화선은 유행처럼 쏟아져 나온 자기계발서 중 하나에서 본 듯한 글귀를 문득 떠올렸다. 소리 내어 뱉어 보았다.

어른들의 놀이란, 현실의 형세란 그런 것이다.

마치 화선이 지금 막 구워낸 말처럼 따끈하고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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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감사합니다. 연락드리겠습니다.

운이 좋게도 휴가를 내어 둘러본 세 집 중 마지막 집은 나쁘지 않았다. 아침부터 긴장한 탓인지 부동산 사장과 헤어지자마자 온몸이 녹아내렸다. 눈앞에 보이는 벤치로 가 앉으니 작은 놀이터가 눈에 들어왔다.

아직 우레탄이 깔리지 않은 놀이터 바닥에 몇 아이들이 쭈그려 앉아 정신없이 모래놀이를 하고 있었다. 주인들이 놀이에 열중한 사이 알록달록한 가방들은 놀이터 한쪽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만 한 아이들과의 교류는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화선이 추측하기에 아이들은 아홉 살 혹은 열 살 정도 되어 보였다.

화선도 그만 한 때에 불빛이 나는 캐릭터 운동화를 신고 쭈그려 앉아 친구들과 나뭇잎을 빻거나 돌을 주우러 다닌 적이 있었다. 빨강노랑파랑 미끄럼틀을 오르고 내리며 아직 다 자라지 않은 폐로 거친 숨을 내쉬었었다.

‘끝’의 개념이 없었던 그때의 놀이는 대개 외부 요인으로 인해 급하게 막을 내리곤 했다. 예를 들면 술래를 하던 연우가 학원을 가야 해서, 하늘에서 갑자기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는 바람에, 퇴근하는 엄마의 부름에, 화선은 잔뜩 느린 박자로 번쩍거리는 운동화 불빛이 이끄는 집으로 향했다.

다녀왔습니다, 하는 소리와 함께 집에 들어서고 나면, 집 안에는 어린 화선의 주목을 끄는 것이 많았기에 중단되어 버린 놀이에 대한 미련은 금방 사라졌다. 화선은 키우던 금붕어가 미끌거리는 꼬리를 찰랑거리며 햄스터 똥 같은 먹이를 좇는 순간을 관찰했고, 뜨거운 밥 위에 케찹을 찍은 치킨 너겟을 올려 한 입에 욱여넣었고, 좋아하는 캐릭터가 나오는 텔레비전 프로를 보았고, ‘좋았다’ 혹은 ‘즐거웠다’는 표현이 하루도 빠지지 않는 일기를 썼다. 그리고 다음 날 놀이터에서 놀이를 다시 시작했다.

어제의 놀이는 흐릿하게 지워버린 채 하고 싶은 놀이를 기분에 따라 골랐다. 놀이의 규칙은 놀이터 일원들의 ‘근데’를 통해 수정되고, ‘그래’를 통해 수립되길 반복했다. 화선은 공주가 되었다가 엄마가 되었다가 술래가 되었다가 깍두기가 되었다가 도둑이 되었다가 세 살배기 아기가 되었다.

옛 기억을 더듬던 화선은 집을 찾고 있는 지금을 하나의 놀이로 치부하고 싶었다. 요란하게 현악동 매물을 들추다가 마음에 드는 집을 발견하거나 발견하지 못하거나 어쨌든 저녁이 되면 집으로 가야 하는 놀이. 원하는 집이 십억 오천만 원이라 가진 돈으로 살 수 없다면, 오억 칠천만 원이라는 파격 세일을 대안으로 감행하는 놀이. 무릎까지 내려오는 니트 조끼를 입은 부동산 아줌마가 번들거리는 분홍색 입술로 ‘매물이 나와도요, 금방 빠져요, 요새는.’ 하고 구스렁한 입냄새를 풍길 때 ‘그럼 바로 계약할까요?’ 하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도 아무렇지 않은 놀이. 저녁이면 집 따위는 내 알 바가 아니라는 듯 오로지 밥 한 숟가락을 입안에 구겨 넣는 일에 심취하는 놀이.

어른이 된 화선에게 ‘저녁이 되면’ 구절은 계약 마감일은 불러내는 카운트다운에 불과했다. 내일을 위해 할 수 있는 행동 요령은 과거를 되새김질하거나 잠든 조상들을 귀찮게 하는 것뿐이었다. 필요한 집을 마련하지 못하면 몇억 몇억하는 집들이 뭉실거리는 거리에 내몰려서, 새벽 거리를 지나는 쓰레기차에 불필요한 오해를 사는 형편이 된다. 근데 나는 깍두기니 그냥 공짜 집을 하나 갖겠다는 수정은 통하지 않는다.

화선은 뻐끔거리며 물었다.

이사놀이 같은 것은 어떨까?

화선의 질문에 어린 화선은 굳은 표정으로 지금 집에 가야 해요,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모래가 묻은 까끌한 손을 털어냈다. 엄마가 부른 모양이라는 추측을 하며 슬그머니 멀어지는 뒷모습을 잠자코 바라봤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확하게 암기하고 있던 애니메이션 주제가의 주인공이 마지막까지 손을 흔들어 주는 듯 저 멀리에서도 빛을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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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오는 길에 화선은 부동산에 전화를 걸어 집을 계약하겠다고 전했다. 부동산 아줌마는 반색하며 빠른 시일 내에 계약 날짜를 잡겠다고 전화를 끊었다. 당분간 아껴 쓰고 아껴 먹고 해야겠지만, C자 모양이 등을 맞댄 로고를 몸에 두르거나 삼등분 원을 매단 차를 몰 수는 없겠지만 그게 어른의 놀이라고, 현실의 형세라고 생각했다.

작가의 말

인생은 하나의 놀이.

우리 다 해본 적 있는.